2023. 10. 8. 22:43ㆍ■ 스포츠/월드 스포츠
양궁의 역사
기원
인류는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개발하여 이용하면서 제반 욕구를 충족시켜왔고 그 중에서도 생존과 번영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달해 온 것이 활과 화살이라 할 수 있다. 실제 활과 화살은 원시사회에는 생존의 수단으로,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는 뛰어난 전쟁무기로, 그리고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의 다양한 욕구 충족을 위한 스포츠 활동으로 인류 문화에 이바지 하여온 유구한 역사적 산물이라 하겠다.
이러한 활과 화살이 어떻게 해서 발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선사시대의 원시사회에서 용구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생활도구, 특히 사냥 도구로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활과 화살의 기원은 그 유래가 유구하나 그 기원이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원시인들과 직립원인들이 활과 화살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고고학자들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고 “문명의 기원”(G. Child)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 말엽(1~3만년전) 경 활을 사용했다고 하며 일부 고고학자는 약 10만 년 전부터 사용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탄력을 응용한 활과 화살이 존재한 흔적은 구석기 시대 말기에 나타난다. 즉 후기 구석기시대에 유럽 남부의 러시아, 스페인, 북아프리카지역 에서 화살촉이 발견되어 활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사용되었음이 증명되고 “대영백과” 사전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카스테론주 산악지역에 동굴벽화에서 활의 사용을 추정하고 있으며 최근 기네스 북에는 스페인의 중석기 동굴벽화에서 활과 화살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어 후기 구석기시대와 중석기 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인류의 생활도구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활과 화살의 발달
불의 발견이나 문자의 발달과 함께 활과 화살의 발명은 분명 인류 생존과 번영에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생존을 위한 사냥무기로서의 그 위력은 개인수렵을 하는 형식으로 발달되었고 인류가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고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즉 청동 금속발견과 함께 화살촉의 강도가 높아지고 이후 철기의 발명을 통하여 종전의 수렵용도보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위한 영토확보와 부족간, 민족간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 커지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강력한 전투무기로 발달, 원시사회에서 고대 국가를 건설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특히 원거리는 물론 산악지대와 높은 성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활의 기능은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었다. 결국 활과 화살은 원시시대 이후 생존수단에서 고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투무기로 위력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그 위력은 중세사회 초기까지 정복전쟁에 있어서 절대적 무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화약무기의 등장은 전쟁에서 활과 화살의 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기능상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민간의 개인 수렵활동을 통한 생활수단 또는 대중적인 놀이수단의 하나로 명맥을 잇게 되었고 중세귀족을 중심으로 오락적인 스포츠로 전환되면서 중세 말기에 이르러 대중적인 스포츠로 성립되는 배경이 되었고 이는 근대 스포츠의 한 분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양궁 시초
세계양궁은 1931년 국제양궁연맹을 결성하여 세계적으로 그 보급이 확대되고 있었으나 한국은 전통 궁도가 행하여졌을 뿐 당시 양궁에 대한 정보나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한국에 상륙하여 주둔하였던 군인들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추정근거로서 1950년도 말경 사용하다 버려진 서양 활이 국내 고물 수집상에서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추정되며 당시 주력 주둔군인 미군부대 내 등 일부 제한지역과 외국인에 의해 간헐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전통 궁도인이나 일반인에게는 양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실정이었다. 따라서 국내인에 의해 양궁이 행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한국양궁의 시작은 아닌 것이다. 다만 한국양궁의 출발에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궁술 연구회 창립
조선 궁도회로 개칭
조선 궁도협회로 개칭
대한 궁도협회로 개칭
석봉근씨(당시 체육교사)에 의해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 수집상에서 양궁 발견
북한 국제양궁연맹에 가입
*대한궁도협회에서 규약을 개정하고 양궁종목을 삽입하여 장려 시작
서울 성동 중학교 궁도부 써클 창설(석봉근)
한국 양궁의 역사
우리나라에 양궁이 도입 된 것은 1959년 당시 체육교사였던 故 석봉근 선생이 서울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양궁을 발견하여 구입한 후 양궁의 보급을 모색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후 1962년 미군 에로트 중령이 장충단공원 석호정에서 최초로 양궁시범을 보였고, 1963년부터는 국궁대회에서 양궁경기가 시범종목으로 실시되어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 제6회 전국 활쏘기대회>는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양궁대회로 당시 대회에는 유엔군 총사령관인 “하우즈대장”을 비롯한 주한 외교 사절단이 참가하였다. 한국은 1963년 국제양궁연맹(FIT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국제 스포츠계에 공식적인 한국양궁의 출범을 알리게 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양궁강습회가 열렸으며 전국 남, 여 양궁종별선수권대회가 창설되었다.
한국 양궁은 1970년대에 들어와 큰 발전의 기회를 잡게 되는데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에 의한 안보 체육의 강화로 남학생은 태권도, 여학생은 양궁을 장려하여 양궁의 보급은 물론 저변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4년에는 최초로 한. 일 친선 양궁경기가 열렸으며 제3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 양궁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양궁의 소년체전 정식종목 채택으로 선수가 조기 발굴되어 우수한 국가 대표선수들이 배출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양궁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국제대회로서는 처음 출전한 한국 여자부는 한국양궁 최초 국제대회 개인 금메달(김진호)과 단체 준우승의 쾌거를 이룩했다. 이듬해 1979년 한국에 양궁이 도입 된지 20년 만에 첫 출전한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60m, 50m, 30m에서도 1위를 하였다. 1979년 세계 선수권대회 재패는 한국 양궁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사상 첫 기록경기 세계 제패라는 금자탑을 이룩한 쾌거였다.
1983년에는 대한궁도협회에서 국. 양궁을 분리하여 초대 대한양궁협회장에 정몽준 회장을 선임하였고 최초로 양궁 상비군을 결성하였다. 1985년에는 제2대 대한양궁 협회장에 정몽구 회장이 취임했다. 정몽구 회장의 양궁협회장 취임은 한국 양궁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황금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정몽구 회장은 양궁의 저변확대와 우수 인재 발굴, 첨단 장비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와 함께 체육단체에서는 최초로 스포츠 과학화를 추진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높이는 등 세계화를 향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기틀을 마련해 왔다.
아울러 양궁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하여 장비의 품질을 직접 점검하고 개발토록 독려해 세계 최고 수준의 장비를 갖추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품질 개발을 바탕으로 전 세계 양궁인 들이 한국산 장비를 선호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왔다. 정 회장은 주요 경기 때 마다 선수들을 직접 만나 격려하고 포상금을 지급하는 등 양궁사랑으로 선수단의 사기진작에 큰 힘을 보탰다. 또한 취임해인 1985년 제 33회 세계양궁선수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1986년 아시아양궁연맹 회장, 1993년 세계양궁연맹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양궁의 국제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2005년에는 현 대한양궁협회 회장이신 정의선 회장이 제9대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하여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한국 양궁의 르네상스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선수들의 맞춤형 훈련 개발 및 훈련 전산화를 통한 과학적 훈련 기법 적용과 국산 장비의 품질 개선 등 스포츠 과학화를 통한 경기력 향상을 지원했다. 또한 국내대회 활성화와 꿈나무 육성사업, 각종 양궁 발전 사업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실시하는 한편 선진화되고 투명한 협회 운영으로 양궁발전을 위해 힘썼다.
또한 취임 첫해 아시아양궁회장에 취임하여 아시아 양궁 저개발 국가 순회지도자 파견 및 양궁 장비 지원 등 글로벌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의선 회장의 적극적인 행보는 성적으로 이어졌다. 취임 첫 해에 스페인 마드리드 세계선수권대회 전 종목 석권, 이듬해 도하 아시아경기대회 전 종목 석권은 물론, 10년 광저우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도 2연속 전 종목 석권을 이룩하고, 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숙원이었던 올림픽 첫 전종목 석권이라는 쾌거를 거뒀다.이 기세는 20년(21년개최) 도쿄올림픽까지 이어서 여자 단체전 9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과 양궁 혼성팀전 원년 우승 및 양궁 최초 3관왕을 배출하는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정몽구, 정의선 회장의 대를 이은 양궁에 대한 애정과 열정,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이 한국 양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대한양궁협회 (archery.or.kr)
용구
활을 쏘기 위해 필요한 용구는 사용하기 편리하고, 성능이 우수하여 적중률이 높아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활과 화살 그리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부속품들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야 기록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각자 갖고 있는 힘이나 팔의 길이 등 신체 조건과 기타 요소들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양궁을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어떤 장비를 선택해야 할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양궁에 필요한 용구를 자세히 알아보고, 전문가와 상의하여 자신에게 알맞은 장비를 선택해야 한다. 장비의 명칭, 종류, 기능은 다음과 같다.
활의 부분 명칭
팁(Tip)
활의 상, 하 끝부분을 말하며 활 줄을 거는 곳이다.
스트링 나크(String nock)
활줄을 걸기 위하여 림의 윗부분에 파인 홈으로 상단의 것을 어퍼 나크, 하단의 것을 로어 나크라고 한다. 림 부분 활줄이 와 닿는 중심부분이며, 활줄을 끼웠을 때 중심에 정확히 와 있어야 한다.
림(Limb)
활 상, 하부의 날개 부분을 말하며 상부를 어퍼 림, 하부를 로어 림이라고 부른다. 화살을 날려 보내는 기능으로 강도에 따라 화살의 비행 속도와 거리가 달라진다.
핸들 그립(Handle grip)
활 핸들의 손잡이 부분을 말하며 미는 팔의 압점에 따라 개인의 자세에 크기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 활을 잡고 미는 팔의 중심을 잡아 주는 부분이다.
사이트 윈도우(Sight window)
조준기를 조준하고 클리커와 애로 레스트를 부착시키기 위하여 깎아놓은 부분을 말하며, 활의 핸들 부분에 화살이 활의 중심선을 통과해서 화살의 비행을 안정되게 하여 준다.
피봇 포인트(Pivot point)
활의 핸들 그립 부분에 힘이 가해지는 지점이며, 그립의 형태에 따라 압점이 달라진다. 활의 중심점으로 틸러 하이를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써빙(Serving)
현에 화살을 끼우는 중앙 부분으로 마찰에 의해 약해지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서 실을 감아 둔 부분을 말한다. 이 곳에 나킹 포인트(Nocking point)를 감아 사용한다.
나킹 포인트(Nocking point)
화살을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써빙 줄로 감아 놓은 부분을 말한다. 위치가 변하면 조준점의 상, 하가 달라진다. 화살을 활줄에 끼워 상, 하로 움직이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리커브(Recurve)
림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진 곳으로 화살 속도를 높이는 작용과 쇼크의 흡수 그리고 활줄에 바른 방향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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