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3. 04:52ㆍ■ 菩提樹/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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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정보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경상남도 창녕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주 문왕(周文王)의 7남인 성숙무(郕叔武)의 후손들이 국명을 성으로 삼았다. 고조선의 대신 성기(成己), 백제의 좌평(佐平) 성충(成忠) 등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
위키백과 -
조선전기 문신·학자 성현·성중성 등이 1493년에 간행한 창녕성씨의 족보. | 내용 편저자는 성중성이며, 흔히 ‘창녕성씨 계축보(癸丑譜)’라 불린다.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성현의 서문과 성중성의 발문이 후대에 간행된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있는 성씨의 오래된 가옥이다. 성씨 고가는 대지 내에 안채, 사랑채, 창고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총 6동의 건물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앞에 사랑채와 중문채를 두고, 안마당 좌우에 토담집...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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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털 파카 안입은 여대생 간첩"..그 뒤엔 이 '미다스 손' 있었다
비즈 스토리아웃도어 열풍 이끈 '섬유업 50년 대부'성기학 영원무역·아웃도어 회장27세 영원무역 창업해 외길 걸어회사명은 팝송 '더 영 원즈'서 따와'오리털 파카' 돌풍 일으킨 주역1970년대 섬유산업 부활 이끌어노스페이스 출시 25주년 맞아"아웃도어 시장 미래 여전히 밝아"
경남 창녕군 석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창녕 성씨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100여 칸에 이르는 기와집 중 주요 건축물로 꼽히는 것은 경근당(敬勤堂)과 일신당(日新堂). 이 당호(堂號)는 영원무역의 홈페이지에도 등장한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성기학 영원...
한국경제10시간전다음뉴스 -
창녕 성씨 고택 대청마루 내려서면 제주바다에 닿는다
임창민 아트사이드갤러리 '앳 더 모멘트' 전서울 창덕궁 수강재 밖 구미 대해폭포제주 애월 해걸음 공사장 앞 포항바다..사진풍경 속 움직이는 다른 풍경 영상이질적 조합서 이상적 조화 찾은 작업고요한 중에 움직임있는 '정중동' 세상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그것들이, 사진 안에 길을 내고 있는 거다.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고택의 봄’(2021). 창녕 성씨 고택의 대청마루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내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은 저 바깥풍경은 제주의 어느 바다다. 실제 작품에선 나뭇가지와...
이데일리2021.06.14다음뉴스 -
성씨세고·성여신 부사집 경남도 문화재 지정
잡고자 진주 금산마을에 여씨향약과 퇴계동약을 본받아 상호부조와 학문연마를 시행한 인물이다. 진주 임천서원과 창녕 물계서원에 제향 됐다. 성씨세고는 부사 성여신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들과 손자, 당대 교유한 인물들과 주고받은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이...
경남일보2022.07.04 -
고창의 발견 K뿌리<7> 고창의 성씨와 집성촌
이어 토성과 세거성씨가 중심이 되어 성(姓)과 본(本)이 같은 부계의 혈족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인 집성촌은 창녕성씨를 비롯해 창녕조, 창원황, 천안전, 청도김, 청주한, 평강채, 평산신, 함양박, 함양오, 함평이, 해주오, 해주최 등이다. 고창군의 집성촌은...
새전북신문2022.04.10 -
[역사이야기] 논산 파평 윤씨 유적 답사
찾았다. 대사간 윤황은 우계 성혼에게 배웠는데 성혼의 사위가 됐다. 그는 8형제(적출 5명, 서출 3명 속칭 팔거)를 낳았다. 창녕성씨 부인이 낳은 다섯 아들이 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 다음은 유봉영당(酉峰影堂...
천지일보2022.06.23 -
'창녕 성씨 고가'에서 역사여행를 떠나보자!
6.25때 소실 '노스페이스' 영원무역 복원
면적이 약 1931㎡에 이르는 성씨 고가는 가옥에서 가옥으로 이어지는 규모가 한마디로 옛날 부농의 삶을 느끼게 한다. 한옥은 무려 130여 칸에 이른다. 겉모습을 보기 전, 창녕이 양파시배지로 불리는 사연은 성씨 고가의 주인 성낙안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낙안...
프레시안2019.08.05다음뉴스 -
사찰의 정원석에서 '신라국 김공순' 글자가.."'명필' 김생의 친필"[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신라 김씨=소호금천씨의 후예’라는 인식이 당대에 뿌리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호금천’은 누구인가. 중국신화에서 새를 숭상한 동이족의 수령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은 “동쪽...
경향신문2022.06.28다음뉴스 -
2019 한국의 명가Ⅴ 창녕성씨 특별전 개최
대전시립박물관은 오는 20일부터 2020년 3월 31일까지 대전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2019 한국의 명가Ⅴ창녕성씨(昌寧成氏) 특별전- 문행지문(文行之文), 사교(四敎 : 文ㆍ行ㆍ忠ㆍ信)를 세우다`를 개최한다. 한국의 명가전은 14년부터 진행하는 연속 전시로, 한국의...
세종nTV2019.12.18관련기사대전시립박물관, 한국의 명가Ⅴ 창녕성씨 특별전 개최충남일보2019.12.18대전시립박물관, 2019 한국의 명가Ⅴ 창녕성씨 특...뉴스충청인2019.12.18[전시] 2019 한국의 명가Ⅴ 창녕성씨 특별전 '문행...뉴스티앤티2019.12.18 -
춘천 한백록 장군 묘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형극으로 알아보자
전쟁터에서 전사한 한백록 장군의 유해는 노비 득충이 홀로 남해에서 춘천으로 수습해 왔다. 한 장군의 묘역은 그의 부인 창녕 성씨와 합장묘이며 그 곁에 득충의 묘도 함께 하고 있다. 득충 제작진과 충장공한백록기념사업회는 최근 묘역도 참배했다. 인형극은 신비...
강원일보2022.06.01 -
[대전매력찾기] 가장 오래된 용안이씨묘의 배냇저고리, 송병하의 명필 보려면 대전시립박물관으로
금평면(今坪面) 구정(九井:구두물: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을 뜻하는데, 구정의 또 다른 한자 표기일 것이다. 구정에는 창녕성씨 성원묵(成原默, 1785~1865)과 그 후손들이 살았다. 반남박씨 박회수가 기탁했다.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대한제국 1907년의 것...
중도일보2022.05.23 -
창연한 창녕성씨 고가, 잘린 한쪽 날개
어묵리들을 빚어내고, 낙동강으로 흘러들면서 정지들을 펼쳤다. 토평천을 활대 삼아 팽팽하게 당긴 시위의 중심에 대지면 석리 창녕성씨 고가가 있다. 고가 뒤엔 구릉 하나 있다. 누우면 들이요 서면 산이라, 그 위에 장군죽 늘푸른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한겨레2014.02.25다음뉴스 -
밀양 미리벌박물관 유물 2건 도문화재 지정
진 풍속을 바로 잡고자 진주 금산마을에 여씨향약과 퇴계동약을 본받아 상호부조와 학문연마를 시행한 인물이다. 진주 임천서원과 창녕 물계서원에 제향됐다.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성씨세고’는 부사 성여신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들 및 손자, 당대 교유한...
경남신문2022.07.05관련기사미리벌민속박물관 소장 유물 경남도 문화재 지정경남도민신문2022.07.06 -
창녕 성씨古家, 대이어 노블레스 오브리주 실천하는 집안
집안 성씨古家가 자리하고 있다.2016.8.4/뉴스1 © News1 이철우 기자 (부산ㆍ경남=뉴스1) 이철우 기자 =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동마을에 성씨 가문의 흔적이 깃든 성씨고가(古家)가 여름 휴가철을 맞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 성씨 고가는 대를 이어...
뉴스12016.08.04다음뉴스 -
춘천시립인형극단, 호국보훈의 달 기념 특별공연 <득충>
남해에서 춘천으로 수습해오며 지금의 한백록 장군 묘역이 조성됐다고 한다. 춘천시 서면에 있는 묘역은 한백록 장군과 정부인 창녕성씨와의 합장묘인데, 그 곁에 사내종 득충의 묘도 함께 하고 있다.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창작된 인형극 <득충>은 신비로운 자개함...
유교신문2022.05.18관련기사호국보훈의 달 기념 춘천시립인형극단 특별공연 '...신아일보2022.05.17 -
창녕우포늪 국제심포지엄 개최 [창녕소식]
환경정화를 실시했다. 대청소를 통해 마을진입로, 토평천 하천, 성씨고가 등 관광지 주변까지 겨우내 방치된 영농폐기물 및 생활...단체에 감사드린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창녕=최일생 기자 k7554@kukinews.com
쿠키뉴스2022.04.13다음뉴스 -
창녕성씨 고택을 방문하다
창녕군 대지면 석리 324번지에 있는 석동 마을로 간다. 창녕성씨 고택은 4개동으로 30여 채의 한옥에 200여칸의 방이 있단다. 우리나라에서 자연 생태계를 연구하고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 우포 늪 근처에 있다. 언젠가 아이들을 데리고 우포늪은 방문한 적이...
세계일보2010.12.01다음뉴스 -
창녕 ‘성씨고가(成氏 古家 )’와 양파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있는 `성씨고가`는 지난 2004년 7월 1일자로 경남도 지방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됐다. `성씨고가`는 기와건물 37동 130칸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상당 부분 소실됐다가 최근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에 의해 대부분...
경남매일2012.09.24 -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45- 창녕성씨(昌寧成氏)
한사람인 성빙수는 성삼문과 6촌간이다. 춘향전의‘이몽룡’은 실존인물로 그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1595-1664)이며 창녕성씨 후손이다. 문중에서는 기생과의 사랑 놀음에 양반 자제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 사실이다. 성도령이 이도령...
신아일보2012.05.08 -
성기완 교수, 창녕성씨 유물 800여 점 기탁..닷새간 깜짝 전시
대전시립박물관, 기탁 유물 중 3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
지난 2016년까지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로 활동했던 성기완 계원예술대 교수가 지난 4월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창녕 성씨 유물 800여 점을 대전시립박물관에 기탁했다. 박물관 측은 기탁한 유물에 조선시대 명필로 꼽히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노컷뉴스2018.07.04다음뉴스관련기사성기완 교수, 창녕성씨 유물 8백여 점 기탁YTN2018.07.04다음뉴스성기완 교수, 대전시립박물관에 창녕성씨 유물 800...충청신문2018.07.04성기완 교수가 기탁한 창녕성씨 유물중도일보2018.07.04 -
[반갑다! 문화재] (14)그 아름답고 쓸쓸한 창녕 관룡사의 용선대
본래 창녕군 창락면의 지역으로 옥천동이라 하였다. 옥천마을을 지나 관룡사 가는 길옆에 고려 말, 역사의 중심에 섰던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더리포트202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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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석주선기념박물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21.5.14.
2005년 경기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던 창녕성씨(昌寧成氏) 묘역 중 일부가 산업단지로 편입되면서 성급(成汲,1553~1621)과 배위 평창이씨(平昌李氏)의 분묘가 이장되었다....
도서30,400원 -
『창녕 성씨 이야기』는 창녕 성씨 연원, 세계와 행렬, 창녕성씨의 명현록을 기록한 책이다.
도서17,820원 -
저자 창녕성씨문중 | 역자 성인출 | 문창사 | 2010.3.30.
『성효자 김열부 행록』은 효자와 열부의 한문으로 된 이야기를 누구나 쉽게 읽어 볼 수 있도록 토를 달고 뜻을 풀이하여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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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연원(昌寧成氏淵源)
1. 창녕성씨(昌寧成氏) 요약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 중엽에 중윤호장(中允戶長)을 지낸 휘(諱) 인보(仁輔)이다.
창녕성씨는 시조로부터 6世에서 13派(判書公派, 獨谷公派, 檜谷公派, 桑谷公派, 郎將公派, 判事公派, 侍郞公派, 貞節公派, 舍人公派, 佐郞公派, 評理公派, 檢校公派, 知事公派,)로 분류되어 조선조(朝鮮朝)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친 명벌(名閥)의 하나이다.
창녕성씨는 인구는 적어도 문묘배향(文廟配享) 1명(成渾), 묘정배향(廟庭配享) 1명(成希顔), 상신(相臣) 5명(成石璘, 成奉祖, 成 俊, 成希顔, 成世昌), 문형(文衡) 2명(成俔 成世昌), 대제학(大提學) 10명, 청백리(淸白吏) 5명(成 俔, 成世章, 成泳, 成夏宗, 成以性), 호당(湖堂) 5명(成三問, 成 侃, 成 俔, 成重俺, 成世昌),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138명을 배출하였으며 무과급제자(武科及第者)는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족보나 문헌지를 보면 상당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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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배향(文廟配享) - 문묘의 배전(配殿)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후대 유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석전(釋奠) 때 함께 제사하는 일.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문묘(文廟)에 후대의 유현(儒賢)을 배향하는 전례는 동아시아의 전근대 왕조에서 매우 중요한 의전이었다.
*묘정배향(廟庭配享) - 예전에 공로가 많은 신하가 죽은 뒤에 종묘에 배향하는 일을 이르던 말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총칭으로 상국(相國)이라고도 한다.
*문형(文衡) -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인데, 문형은 국가의 최고의 문병(文柄)을 잡고 사명(辭命) 과시(科試)등을 통할하며 학문과 관계되는 일을 모두 관장하였다.
*대제학 - 정이품의 관계(官階)이지만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석유(碩學․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인데, 학자와 인격자로서의 최고 지위라고 할 수 있어 본인은 물론 일문(一門)의 큰 명예로 여기었다.
*청백리(淸白吏) - 청백리는 그의 인품, 경력, 치적 등이 능히 모든 관리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어야만 청백리로 녹선(錄選:선정하여 기록에 올림)된다.
*호당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別稱)으로서 세종 8年(1426)에 시작된 제도로서, 문관 중에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우대하여 사가(賜暇:휴가를 줌)하여 오로지 학문을 닦게 하던 서재(書齋: 九齋의 하나로, 서경(書經)을 공부하던 성균관의 한 分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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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많은 석학(碩學), 절신(節臣), 고관(高官)을 배출하였다. 특히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과 생육신(生六臣) 성담수(成聃壽)를 배출함으로서 절개(節槪)로 유명한 문중(門中)이 되었다.
-2세(二世) 휘(諱) 송국(松國)은 고려 문하시중(高麗 門下侍中)이시다. 公이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겼었는데 시조(始祖) 중윤공(中允公)이 타향(他鄕)인 송도(松都)에서 별세(別世)하시자 직접 시신(屍身)을 지고 천리(千里)나 되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다가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니 해가 저물고 눈이 많이 내려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院)의 사랑에서 가숙(假宿)하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범이 시체 곁을 여러 번 맴돈 흔적(痕迹)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발자국을 따라 맥산(麥山)에 이르니 발자국도 멈추고 눈이 녹았는데 넓이가 산소(山所) 한자리쯤 되었다. 그 곳을 표시(表示)해 놓았다가 이곳에 안장(安葬)하니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孝誠)의 감응(感應)이다 하였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주향(主享)되셨다.
-3세(三世) 휘(諱) 공필(公弼)은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휘(諱) 한필(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都僉議 門下贊成事)였다.
-4세(四世)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였고,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며, 군부(君阜)는 중낭장(中郎將)이었다.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 門下評理)였고,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였다.
-5세(五世)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여완(汝完)은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였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준득(準得)은 총부상서(摠部尙書)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유득(有得)은 정승(政丞)이었으며, 윤득(允得)은 지신사(知申事)였다. 이(履)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었으며, 저(貯)는 선부전서(選部典書)였다.
-6세(六世) 기(紀)는 판서(判書)였고, 석린(石璘)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석용(石瑢)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석연(石珚)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며, 석번(石璠)은 낭장(郎將)이었다. 연(連)은 판서(判事)였고,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다.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태준(台俊)은 사인(舍人)이었고, 사준(士俊)은 좌랑(佐郞)이었다. 갑신(甲臣)은 평리(評理)였고, 을신(乙臣)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었으며, 언신(彦臣)은 지림주사(知林州事)였다
-7세(七世) 달생(達生)은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원사(崇祿大夫 判中樞院事)이고 시호(諡號)는 양혜(襄惠)이다. 사달(士達)은 호(號)가 이암(易庵)이며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참여되었고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8세(八世) 승(勝)은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병자화(丙子禍)에 아들과 함께 죽었다 이름이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희(熺)는 호(號)가 인재(仁齋)인데 병자화(丙子禍)에 여러 번 엄한 국문을 받았으며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으나 충분(忠憤)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났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봉조(奉祖)는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다.
-9세(九世) 삼문(三問)은 호(號)가 매죽당(梅竹堂)이며 벼슬은 승지(承旨)였는데 세조(世祖)가 선위(禪位)를 받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화(禍)를 당했다. 사실(事實)이 육신전(六臣傳)에 나타나 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담수(聃壽)는 호(號)가 문두(文斗)이며 진사였다 침낭(寢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고 병자화(丙子禍)에 김시습(金時習) 등 5명(五名)과 함께 충절(忠節)을 지켜 행동은 달라도 마음이 같으니 세상에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한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숙(靖肅)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임(任)은 호(號)가 안재(安齋)이고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간(侃)은 호(號)가 진일재(眞逸齋)이고 집현전 박사였고 호당(湖堂)에 올랐다. 현(俔)은 호(號)가 허백당(虛白堂)이며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였고 문형(文衡)을 받았다 시호(諡號)는 문대(文戴)이다. 준(俊)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이고 시호(諡號)는 명숙(明肅)이다. 건(健)은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는 문헤(文惠)이다. 중엄(重淹)는 호(號)가 청호(晴湖)이고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였으며 호당(湖堂)에 올랐다.
-10세(十世) 세창(世昌)은 호(號)가 둔재(遯齋)인데 문형(文衡)을 받았고 벼슬은 좌의정(左議政)이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몽정(夢井)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인데 하산군(夏山君)에 봉(封)해졌다.
-11세(十一世) 제원(悌元)은 호(號)가 동주(東洲)인데 벼슬은 현감(縣監)이었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운(運)은 호(號)가 대곡(大谷)인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벼슬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이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침(守琛)은 호(號)가 청송(聽松)이고 벼슬은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종(守琮)은 시호(諡號)가 절효(節孝)이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희안(希顔)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며 묘정배향(廟庭配享)되었다,
-12세(十二世) 윤해(允諧)는 호(號)가 판곡(板谷)인데 현감(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혼(渾)은 호(號)가 우계(牛溪)인데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이며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수경(守慶)은 벼슬이 판관(判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진양성(晋陽城)이 함락되자 김시민(金時敏)등과 함께 순절(殉節)하였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물게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세장(世章)은 호(號)가 사암(思菴)이고 벼슬이 호조판서(戶曹判書)였는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3세(十三世) 문준(文濬)은 호(號)가 창랑(滄浪)인데 벼슬은 현감(縣監)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남(灠)은 호(號)가 청죽(聽竹)이고 벼슬이 현감(縣監)이었는데 별세할 때에는 유훈(遺訓)을 남겼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언충(彦忠)은 호(號)가 가정(稼亭)이고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영(泳)은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4세(十四世) 하종(夏宗)은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5세(十五世) 여신(汝信)은 호(號)가 부사(浮査)인데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의(安義)는 호(號)가 부용당(芙蓉堂)인데 벼슬은 승지(承旨)였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十六世) 이성(以性)은 호(號)가 계서(溪西)이고 벼슬이 부사(府使)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환(瑍)은 호(號)가 유촌(柳村)이고 벼슬이 공조참의(工曹參議)였는데 창녕성씨기축대보(昌寧成氏己丑大譜) 편찬(編纂) 물계서원(勿溪書院) 창건(創建) 성시중효행록(成侍中孝行錄) 편찬(編纂)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22세(二十二世) 기운(岐運)은 자(字)가 봉서(鳳瑞)이고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지냈다.
2. 昌寧成氏의 연원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중윤호장(中允戶長)을 지낸 인보(仁輔)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 저(新羅 大官 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姓氏略史)”에는 시조 인보(始祖 仁輔)가 고려 고종(高麗 高宗)때 성씨(成氏)의 성(姓)을 창성(創姓)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 기타 문헌사료(族譜 其他 文獻史料)도 시조(始祖)는 인보(仁輔)로서 상계(上系)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성씨(成氏)의 유래(由來)이다.
창녕성씨 족보 계축보(昌寧成氏 族譜 癸丑譜)는 성종(成宗) 24년 계축(서기 1493년)에 처음 편찬되어 성씨족보(成氏族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계축보(癸丑譜)라 부른다.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에 시조(始祖)의 유래(由來)와 성씨(成氏)의 세계(世系)를 소상히 적어서 전하여 오고 있으니 이것이 정설(定說)이다.
※ 선세고적(先世古蹟)으로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와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의 문헌자료(文獻資料)를 보면
성씨(成氏)는 주문왕(周文王)의 일곱째 아들인 성(郕)나라 숙무(叔武)의 후손이다. 자손(子孫)들로 인하여 나라를 씨(氏)로 삼았는데 뒤에 초(楚)나라에게 멸망되자 읍(邑)을 떼고 성씨(成氏)가 되었다. 시조 인보(始祖 仁輔)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新羅) 때 대관(大官)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다(국조문헌비고에서발췌:國祖文獻備考 拔萃)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學事 成鏡)이 있었는데 상곡(上谷)사람으로서 동쪽 조선(朝鮮)으로 건너왔다.
그 후 백제(百濟) 때에는 성충(成忠)이 있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성저(成貯)가 있었는데 모두 절의(節義) 와 관벌(官閥)로 한 시대에 들어났다. 고려(高麗) 때에는 숙창(淑昌)이란 분이 계셨는데 벼슬은 호장부정(戶長副正)이었다. 호장부정(戶長副正)이란 바로 옛날의 원외랑(員外郞)인데 이분이 휘 인보(諱 仁輔)를 낳으시니 벼슬은 중윤호장(中尹戶長)이었다. (승인무학전에서 발취:僧人無學傳 拔萃).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으나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이며 고려중엽(高麗中葉) 이후에 일어났는데 중윤공 휘 인보(中允公 諱 仁輔)가 시조(始祖)로 상계(上系)는 상고(詳考)할 길이 없고 고증(考證)할 사료(史料)가 없어 계축보 창제(癸丑譜 創制)할 때 중윤공 휘 인보(中允公 諱 仁輔)를 시조(始祖)로 하였다
註 文獻誌에는 始祖公의 職銜이 中尹戶長인데 中允戶長으로 修訂하였다.
3. 창녕성씨 인구(昌寧成氏 人口)
1985년 인구조사 때에는 38,872 가구, 인구 158,335명이었고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57,248 가구, 인구 184,555명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2015년 창녕성씨 인구 통계
출처 : 통계청, 인구총조사
자료갱신일 : 2017-01-26 / 수록기간 : 년 2015 ~ 2015
자료문의처 : 042-481-3756(전수), 042-481-3735(표본)
전국 : 199,124명
창녕 : 182,377
창영 : 7,500
창령 : 5,433
기타 : 3,814
합계 : 199,124
기타성씨
宬 9, 盛 13, 星 8, 城 6, 합계 36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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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편집: 성범모(창녕성씨 대성회 발행 - '선조자료발표문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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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맥산과 맥산공원]
대지면에 있는 모산 마을 맥산공원을 소개한다. 대지면은 동쪽으로는 고암면, 창녕읍, 서편으로는 유어면, 북쪽으로는 대합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넓은 들이 비옥하여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난 곳이라 한다.
<창녕 맥산 조감사진 ◎표는 시조 묘>
모산리는 대지면의 중앙부로 면사무소와 우체국, 치안센터, 농협지점이 있는 마을이다. 이지역의 지명 유래에는 보리와 잉어가 등장하는데 보리알과 같이 생긴 바위들이 많아서 모산, 맥산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 뒷산이 잉어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부리산, 어두산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맥산공원의 표지석은 개인이 증정했다고 하는데 받침돌에 2006년11월 5일 성정경“증” 이라고 새겨져 있다.
맥산공원이 있는 모산마을은 대지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보리미의 행정 리 명이다. 그리고 창녕 성씨의 세거지이다.
모산마을은 보리미, 보리뫼, 부리뫼라고도 불리는데 한자로는 모산 외에 맥산으로 쓰기도 한다.
마을 뒤에 부리산 또는 맥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는데 여기는 창녕 성씨의 시조묘가 있고 맥산재 (성씨대종재)가 있다.
대대로 이어져 온 창녕 성씨 문중의 이야기를 간직한 공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대지면 모산리 맥산공원 / 작성자: 창녕군 2020. 9. 20.
<2>[ 맥 산 론]
맥산(麥山)의 행룡(行龍)(주1)은 현풍 비슬산에 이르러 남쪽으로 뻗어서 창녕 화왕산(火旺山)이 되었는데, 처음 한 줄기가 떨어져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려 왔는데 중간에 높은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한번 돌아 임갑룡(任坎龍)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한 가운데에서 떨어져 나와 혹은 갑묘(甲卯) 혹은 경태(庚兌) 혹은 병정룡(丙丁龍)으로서 용세(龍勢)(주2)가 굴곡하여 천태만상으로 되었다.
청산원(靑山院) 위에 태양 금성(金星) 한 脈(맥)이 평지로 떨어져 관로(官路)(주3)가 되었으며 갑자기 봉우리 하나가 일어나 마치 호로박 같이 생겼다. 여기에서 다시 크게 끊겨 평지로 된 것이 칠십여 보(步)인데 한 언덕이 들 가운데에 일어나 몸을 뒤쳐 해좌(亥坐)로 되었다.
1) 유어농파형(遊魚弄波形):풍수에서 墓자리와 겉모양과 생김새가 물고기가 물결을 희롱(戲弄)하고 헤엄치는 형국(形局)이라는 것(물고기가 파도를 희롱하며 노는 형상)
2)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 호랑이가 점지해 준 명당이라는 설화를 간직한 묘이다. 호랑이는 산신령의 화신인 만큼 천기와 지기가 조화된 명당이라는 상징을 지닌 곳이다. [출처]김규순 풍수에디터
수세(水勢)(주4)는 화왕산에 나오는 여러 물이 혈(穴) 앞에 모여 만궁형(彎弓形)(주5)이 되어 다정스럽게 정축(停蓄)(주6)되어 있으며 서쪽으로 십 여리로 펀펀히 완만하게 흐르는데 들 가운데 독산(獨山) 수구(水口)를 딱 막고 있다. 안대(案對)(주7) 밖에는 오성체(五星體)(주8)가 모여 길성(吉星)이 전부 모여드니 비록 본신(本身)의 청룡 백호는 없지만 보기에 기이하다.
이것은 바로 눈 속에 호랑이의 발자국으로 찾아낸 명당(明堂)으로서 하늘의 조화였지 인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호랑이 발 자국을 따라 가보니 끝 간 곳이 맥산이었다. 희한하게도 그 곳엔 아버지 시신과 함께 墓 하나 쓸만큼 눈이 녹아 있었다. 이에 아들은 하늘이 점지해준 자리라 여기고, 그 곳에다 아버지 시신을 모시게 됐다고 한다. >
후손이 지금 이십여대가 되었는데 문과에 급제한 자가 백여명이며 경상(卿相)(주9) 유현(儒賢)(주10)과 문장(文章) 절의(節義)의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산 이름은 맥산(麥山)으로 옛부터 유어농파형(游魚弄波形)(주11)이라고 전해온다.
간룡(艮龍)(주12)에 임감입수(任坎入水)(주13)이고 해좌사향(亥坐巳向)(주14)이며 묘득미파(卯得未破)(주15)이다.
<좌측 O표시한 곳이 호랑이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맥산 앞 뒤의 물이 산소 서쪽으로 모였는데 중년 이후 부터는 산 뒤에 있던 연못이 전부 백성들의 논이 되었기 때문에 산 뒤에 있는 물이 서(西)쪽으로 흐르지 않으므로 용맥(龍脈)을 끊어 수로(水路)를 내어 물을 끌어다가 산소 앞으로 들어가는데 술자(術者)는 불길하다 한다.
그러므로 모든 후손들이 볼때마다 이를 금지하며 혹은 내(川)를 막았으나 얼마 가지 못했으므로 파(破)(주16)가 금기하는 곳에 당(當)하게 되었다.
(출처: 창녕성씨 족보, 대종회보 61호. 201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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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행룡:낮았다 솟았다 하며 멀리 뻗어 나간 산맥
2.용세:산의 형세
3.관로:官의 도로
4.수세:穴 주위를 둘러싼 하천의 形氣를 말한다.
5.만궁형:활같이 굽은 형세
6.정축:머물러 쌓여
7.안대:안산이나 조산의 봉우리와 무덤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좌향법
8.오성체:풍수에서 산의 가장 근본적인 형체를 오성으로 분류하고 혈 주변에 파도 로 출렁이는 수성체, 화성체, 목성체, 금성 체. 토성체
9.경상:재상, 삼정승과 육판서
10.유현: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
11.유어농파형:풍수에서 묏자리와 겉모양과 생김새가 물고기가 물결을 희롱하고 헤엄치는 형국이라는 것
12.간룡:산줄기가 간좌의 방향으로 뻗어 나감
13.임감입수:임은 북방을 나타낸다. 감은 물을 상징하고 있는 주역의 괘로서 북쪽 을 나타낸다.
14.해좌사향:산소의 좌향에서 시신의 머리 방향이 해좌이고 발의 방향이 사향이라 는 것
15.묘득미파:혈에서 보아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미 방향이라는 것
16.파: 물이 빠져 나가다.
(출처: 대종회보 61호. 2019.10.1)
<3> [하국근의 풍수기행]
<55> 창녕군 성씨 시조묘
매일신문 2010.4.19.
평평한 들판에서 산이 솟아나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누웠다 일어서는 것과 기댄 상태에서 일어날때를 비교하면 되겠다. 그래서 평지에서 돌출된 혈(穴)은 힘이 더 강하다고 본다.
들판에선 바람도 지면을 따라 불어온다. 풍수에선 바람을 무서워 하지만 평지의 돌혈(突穴)은 이에서 제외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기(地氣)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 대부분의 명당은 산자락 끝 머리에 형성된다. 산과 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들판에선 산이 끝나는 곳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물길을 비중있게 본다. 일반론이지만 물길이 명당을 둥글게 감싸 안는 지점이 중요하다. 이런 형태는 산 자락이 흐르는 방향을 나타내기도 하고, 산이 끝나는 지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인보 묘 주변은 들판이다. 나지막하지만 들판에서 솟은 산이다. 지기가 강하다는 의미이다. 앞 물은 둥글게 묘역을 감싸고 흘러들어와 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흘러 나간다. 나가는 물이 보인다는 것은 곧 재물이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 주변은 봉긋봉긋한 봉리들이 유난히 많다. 금산(金山)이다. 관주산(貫珠山)이란 산 이름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 만하다. 멀리 조산(祖山) 뾰족뾰족한 화산(火山)형태도 보이고 일자(一字)로 쭉 뻗은 토산(土山)엔 문필봉도 아름답게 솟았다. 주위 산세에 포진한 오행(五行)이다.
오행사상은 풍수학의 근본이 된다. 묘소가 있는 맥산을 부리산(浮鯉山)이라고도 한다. 지형을 물 위에 뜬 잉어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도에서 찾아보면 영락없다. 묘가 있는 동쪽, 즉 둥근 산봉우리 쪽이 물이 흘러드는 곳으로 잉어 머리가 되고 꼬리 부분이 서쪽으로 물이 나가는 방향이다.
그러고 보면 물살을 헤치며 잉어가 상류로 올라가는 형상이다. 이는 풍수로 따져 문중이 창성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꼬리 부분엔 인공으로 판 연못이 있다. 언젠가부터 물길이 바뀌어 마을 앞으로 흐르게 되자 대신 꼬리 부분에 연못을 조성, 잉어가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담당케 했다 한다.
모자람을 채우는 것, 곧 비보풍수(裨補風水)다. 전해내려오는 풍수 형국도 유어농파형(游魚弄波形. 물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뛰노는 형국)이다.
옛날 성인보가 개경으로 신년 향리 모임에 갔다가 병사(病死)했다. 아들 송국(松國)이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리 먼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가까이 이르러 날이 저물어 쉬어 가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눈이 쌓였는데 아버지의 시신은 간곳이 없고, 그 위로 호랑이 발자국만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호랑이 발 자국을 따라 가보니 끝 간 곳이 맥산이었다. 희한하게도 그 곳엔 아버지 시신과 함께 墓 하나 쓸만큼 눈이 녹아 있었다. 이에 아들은 하늘이 점지해준 자리라 여기고, 그 곳에다 아버지 시신을 모시게 됐다고 한다. 풍수학계에 전해지는 성인보 묘에 관한 얘기다.
풍수에선 적선을 최고로 친다. 명당을 얻으려면 그만큼 덕을 베풀어야 한다. 그 다음이 명당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몫이다.
행동은 개차반이면서 좋은 땅을 구하려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엔 그 재앙이 스스로에게 닥친다. 좋은 땅은 하늘이 낸다고 했다. 풍수는 순리(順理)를 중시하는 학문이다.
(출처: 명리풍수연구원 희실재 원장 chonjj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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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수집 및 종합편집, 성범모(회곡파 26세 / 경제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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