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2. 05:41ㆍ■ 불교/佛敎 미술
십이지가 불교와 우리 생활에 등장한 건 언제부터 일까?불교와 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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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 권속 십이지 신장으로 표현 사신(四神, 청룡·주작·백호·현무)과 십이지(十二支)에 대한 사상은 역사기록상 중국 한족(漢族)에서 발생했다. 십이지가 연도를 표기하는 기년(紀年)에 응용되어 정리된 시기는 기원 전후다. 중국에서 갑을병정(甲乙丙丁) 등의 십간(十干, 天干)과 자축인묘(子丑寅卯) 등의 십이지(十二支, 地支)의 글자를 아래위로 맞추어 날짜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3,000년 전부터이다. 그것은 갑골문에 ‘병자(丙子)’, ‘계미(癸未)’, ‘을해(乙亥)’, ‘정축(丁丑)’ 등의 글자들이 보임으로써 알 수 있다. 십간과 십이지를 배합하여 60갑자가 합성된 것은 상당히 연대가 지난 뒤에 성립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연대로 표기한 것은 한대(漢代)인 기원전 105년인 병자(丙子)년부터 시작되었다. 약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이지를 다시 동물로 상징화해 자를 쥐, 축을 소, 인을 호랑이 등 동물로 배정한 것은 2세기경인 후한(後漢)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이 처음이다. 십이지가 본격적으로 동물로 표현되기 시작한 건 한나라 때로, 근거는 한경(漢鏡)이다. 그 후 오행가(五行家)들이 십간과 십이지에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을 붙이고,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방법 등을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배열해 인생의 운명은 물론 세상의 안위까지 점치는 법을 만들어냈다. 십이지는 시간과 방위를 나타내는 시간신과 방위신으로 나타나면서 불교와 결부한다. 불화(佛畵)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약사여래 권속으로서 십이지 신장으로 표현된다.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점술가들은 각각 시간과 방위에서 오는 사기(邪氣)는 그 시간과 방위를 맡은 십이지의 동물이 막고 물리친다고 믿었으며, 불가(佛家)에서는 그 시간과 방위를 지키는 불보살과 신중이 물리친다고 믿었다. 통일신라부터 불교건축물에 등장 십이지에 대한 관념은 이집트·그리스·중앙아시아·인도·중국·한국·일본 등 동서양에 걸쳐 광범위하게 편재해 있다. 이 관념이 우리 문화의 한 주제로서 확립된 것은 통일신라이다. 통일신라 이후에 방위신으로서 열두 동물로 상징화된 십이지상이 능묘의 호석, 탑파(塔婆)·석등(石燈)·수미단(須彌壇)·귀부(龜趺)·부도(浮屠) 등 불교적 건축물에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의 십이지상은 불교건조물인 탑파·부도·석등·수미단·귀부 등과 불구(佛具)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능묘의 경우, 십이지 호석은 매우 외향적이고 과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또 큰 규모로 능묘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반면 불교건조물에서는 기단부의 비좁은 공간에 불명확한 형태로 장식·조각돼 있다. 불교건조물의 십이지상은 능묘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어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작고 대부분 춤추는 도무상(跳舞像)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비좁은 기단부에 장식돼 있다. 차림새의 세부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나 갑옷 형태가 아닌 평복을 입고 있으며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 자세는 앉아 있는 좌상(坐像), 춤추는 도무상, 서있는 입상(立像) 등으로 다양하다. 원원사지(遠願寺址) 동서 양탑(東西 兩塔)에는 동물의 머리에 사람 모습의 수수인신(獸首人身)을 한 평복의 십이지 좌상이 있다. 좌상으로는 유일한 예로 기단부 상대중석(上臺中石)에 부조돼 있다. 화엄사(華嚴寺) 서오층석탑, 화원동(化員洞) 삼층석탑, 임하동(臨河洞) 삼층석탑, 금소동(琴韶洞) 삼층석탑의 하층 기단에도 십이지상이 방위에 따라 배치돼 있다. 그 외에 불교건조물로서 십이지상이 부조된 것은 부처님 좌대의 기단으로 추정되는 감산사지를 비롯해 경주 교동 소재 석등기단(石燈基壇)과 무장사(鍪藏寺)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 귀부(龜趺), 태화사지(太和寺址) 부도(浮屠), 청동제 불구(佛具) 등의 십이지상을 들 수 있다. 십이지상은 고려시대 왕릉에 계승돼 다시 형식적 변천이 일어나고, 불교건조물·고분벽화·석관·동경 등 사용범위가 확대된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면 고려조에 확립된 머리에 쓴 관에 묘사된 수관인신상(獸冠人身像, 문관복에 홀을 잡고 있다)의 왕릉조각이 계승되고, 불화(佛畵)로서 춤추는 모습의 십이지도무신장상(十二支跳舞神將像)이 성행한다. 십이지는 통일신라 이래 근대까지 연면(連綿)히 이어 온 우리 민족의 끈질긴 신앙과 사상의 산물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불교조각과 교섭을 가지면서 강력한 호국의 방위신(方位神)으로 채택돼 우리나라의 왕과 귀족의 능묘(陵墓)에 조각·장식됐다. 이렇게 우리나라 십이지상(十二支像)은 세계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자적 양식과 형식을 전개해 왔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십이지는 통일신라 이래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능묘에는 물론 불교건조물이나 회화, 공예품, 그 밖의 일상적인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확대·성행하여 십이지의 조형(造形)과 사상은 한국에서 가장 큰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은 중국적 내용에 불교적 표현을 빌어서 불교건축물이 아닌 능묘에서 나타나다가 불교적 건축물로 이행해갔다. 시대적으로도 일시적인 유행사조로 그친 것이 아니라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고, 현재는 띠동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해는 경자년 쥐띠해 ‘경자(庚子)년’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로 표기한 연도이다. ‘경(庚)’은 십간(十干)의 일곱 번째로 방위는 서쪽, 오방색으로는 흰색에 해당한다. ‘자(子)’는 십이지의 첫 자리로, 방위로 정북(正北), 달로 음력 11월, 시간으로는 오후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다. ‘띠’는 사람이 태어난 해를 십이지를 상징하는 동물로 표현한 방법이다. 쥐띠 해는 갑자[甲子, 靑], 병자[丙子, 赤], 무자[戊子, 黃], 경자[庚子, 白], 임자[壬子, 黑]의 순으로 60갑자를 순행한다. 요즘과 같이 굳이 색깔로 이야기한다면 경(庚)은 오방색에서 흰색에 해당하므로, 경자년는 ‘흰 쥐띠’해가 된다. 쥐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표상(文化的 表象)으로 나타난다. 가야 지역 창고형 고상 가옥에는 쥐와 고양이가 장식돼 있다. 곡식 창고에 올라오는 쥐 두 마리를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곡식 창고나 뒤주의 주인은 쥐였다. 통일신라 이후 쥐는 십이지의 하나로 능묘·탑상·불구·생활용품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쥐 그림은 들에서 수박이나 무를 갉아먹고 있는 모습이 많다. 신사임당이 그린 ‘수박과 쥐그림’이 대표적이다. 수박의 빨간 속살과 그 앞에서 씨앗을 먹고 있는 쥐 한 쌍, 나비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수박은 씨가 많다. 씨가 많다는 것은 다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한 쌍의 쥐는 부부 사랑과 풍요를 뜻한다. 무는 〈시경(詩經)〉 제1편 ‘국풍 곡풍(國風 谷風)’에서 부부의 백년해로를 상징한다. 무는 아래 위를 다 먹을 수 있는데, ‘뿌리만 먹고 잎이 맛없다고 내버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부인이 나이 들어 얼굴이 시든 것만 생각하고, 옛날에 고생했던 일이나 그의 미덕까지 버리고 딴 여자에게 다시 장가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쥐가 수박과 무와 함께 그려진 그림은 부부애와 다산의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쥐는 미래를 예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제9’ 혜공왕 5년조에 보면, “치악현에서 8,000여 마리나 됨직한 쥐 떼가 이동하는 이변이 있고 그 해 눈이 내리지 않는다.”라는 글이 나온다. 쥐는 자연의 이변이나 닥쳐올 위험을 예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쥐가 배에서 내리면 폭풍우가 온다.’는 속담이나 ‘쥐가 없는 배는 타지 않는다.’는 속담에서도 쥐의 이런 신통한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쥐는 다산왕이다. 용한 점쟁이도 상자 속의 쥐 마리수를 알아맞추기 힘들다. 고구려 때 유명한 추남과 조선의 점쟁이 홍계관은 상자 속에 들어있는 쥐의 수를 맞추지 못해 죽었다. 그러나 실제론 암컷 쥐의 뱃속에 새끼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쥐는 생태적으로 언제나 임신이 가능해 새끼를 배고 있다. 즉, 언제나 임신이 가능해 실제 수를 맞히기가 어렵고, 그것은 결국 다산의 상징으로 통했다. 쥐(Mouse)는 정보화(IT)시대에 안성맞춤의 캐릭터이다. 함경도 지방의 창세가(創世歌)를 보면 불과 물의 근원을 알려준 생쥐 이야기가 나온다. 아주 옛날 세상이 만들어질 때 미륵이 태어나 해와 달을 이용해 별을 만들고 자신의 옷을 만들었다. 그런데 만 물과 불의 근원을 알지 못해 날곡식을 먹었다. 생쥐가 물과 불의 근원을 미륵에게 알려주는 대가로 세상의 모든 뒤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몸집은 작지만 어느 곳이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조그만 정보체로 여겼던 조상들의 쥐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쥐는 이렇게 문화적으로 재물(財物)·다산(多産)·풍요기원(豊饒祈願)의 상징이며, 미래의 일을 예시(豫示)하는 영물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결코 유익한 동물이 아니다. 생김새가 얄밉고, 성질이 급하고 행동이 경망한데다 좀스럽다. 진 데 마른 데 가리지 않고 나돌며 병을 옮기고, 집념이 박하고 참을성이 없고 시행착오가 많다. 더욱 혐오스러운 것은 양식을 약탈하고 재산을 축낸다. 결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동물이다. 한 가지 쓸모가 있다면 의약(醫藥)의 실험동물로서의 공헌이지만, 이 역시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자연계의 일원으로써 쥐는 그 존재 의의가 자못 크다. 어떤 재앙이나 농사의 풍흉, 뱃길의 사고를 예견해주는 영물로서 영리하고 재빠르고 근면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는 신성성(神聖性), 예지성(豫知性), 다산과 풍요, 지혜와 현명함, 영리함, 귀여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천 진 기 현 국립전주박물관장. 안동대학교 민속학과를 졸업한 후 영남대에서 석사(문화인류학), 중앙대에서 문학박사학위(민속학)를 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중앙대·가톨릭대·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민속학과 박물관학을 강의한 바 있다. 저서로 〈한국동물민속론〉·〈열두 띠 이야기〉·〈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 동물〉 등이 있다. 글·사진 천진기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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