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힘, 여동생 밸러리..영원한 '선대본부장'이자 '비서실장'

2020. 11. 8. 13:27■ 국제/백악관 사람들

바이든의 힘, 여동생 밸러리..영원한 '선대본부장'이자 '비서실장'

정의길 입력 2020.11.08. 10:56

밸러리, 바이든의 영원한 '선대본부장'이자 '비서실장'
바이든의 학생회장 출마 때부터 선거 총괄
바이든의 가족사 비극 때는 가정 돌봐줘
이번 대선에서도 막후에서 조정 역할

1970년대 초반 초선의 상원의원이던 조 바이든과 그의 여동생 밸러리 바이든 오웬스. 바이든 선대위 제공

“그는 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믿도록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여동생 밸러리 바이든 오웬스(75)다.

바이든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가족의 가치를 신봉하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때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모든 여정에서 가족이 함께 했고, 그 중심 인물은 여동생이었다. 밸러리는 바이든의 고교 학생회장 출마 때부터 이번 대선까지 전면에서 혹은 배후에서 선거를 지휘했다. 밸러리를 바이든의 영원한 선대본부장이자, 비서실장으로 여기는 이유다.

밸러리와 바이든이 인생 항로에서 ‘원 팀’을 구성하게 된 계기는 바이든의 ‘말더듬’이었다. 바이든은 유년 시절 내내 말더듬을 극복하려고 거울 앞에서 말하는 연습을 했다. 밸러리는 옆에서 오빠의 ‘대중 앞 공포증’에 면역을 줬던 청중이자 코치였다. 초등학교 때 선도부원이었던 바이든은 학교버스에서 밸러리가 장난을 치자, 자신의 선도부원 배지를 떼어버렸다. 밸러리가 규칙을 위반했다고 신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족, 특히 밸러리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바이든의 어머니와 그의 남매들. 사진상 어머니 진 바이든의 오른쪽이 장남 바이든이고, 왼쪽이 밸러리다. 바이든 선대위 제공

남매의 정치 역정은 바이든이 고교 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시작됐다. 바이든이 정치인으로 입신한 1970년 델라웨어 뉴캐슬 카운티 의원 선거에서 밸러리는 선거전략가이자 정치컨설턴트의 재능을 발휘했다. 공화당 강세 지역인데다, 20대 중반의 햇병아리 지방 변호사였던 바이든이 돈과 조직에서 밀리는데도 승리한 배경은 밸러리 등 동생들의 헌신적인 선거운동 때문이다. 선거 조직을 총괄한 밸러리는 지역 주민들을 일대일 접촉하는 밑바닥 쓸기 운동으로 돈과 조직의 열세를 극복했다.

1969년 델라웨어 뉴캐슬 카운티 의원으로 출마해 선거운동 대책회의를 하는 바이든과 밸러리. 바이든 선대위 제공

밸러리는 1972년 바이든의 연방 상원의원 선거를 통해 당시로서는 여성에게 희귀한 직업인 선거전략가이자 정치컨설턴트로 완전히 변신했다. 당시 델라웨어 연방상원의원은 공화당의 3선 현역의원 당선이 너무 유력해서, 민주당에서는 아무도 출마하려 하지 않았다.

바이든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에 도전했다. 밸러리는 지역 주민의 집에서 여는 커피모임을 조직했고, ‘바이든 우체국’이라고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의 선거홍보물 배달 조직도 만들었다. ‘바이든 우체국’은 홍보물을 주 전 지역에 보낼 우표값이 없어서, 자원봉사자 조직으로 대체한 것이다. 돈도 쓰지 않으면서 자원봉사자를 통한 선거운동이라는 일석이조를 달성했다.

바이든은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변을 일으키며 29살 최연소 상원의원이 됐다. 표차는 3천표였다. 밸러리가 바이든을 다그쳐서 현장에서 수없이 지역주민과 악수하게 만든 덕택이었다.

바이든이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밸러리는 그의 가정을 지켜낸 수호자로 변신했다. 상원의원 취임 전 바이든의 첫 부인 넬리아 헌터와 막내인 셋째 딸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두 아들도 중상을 입었다. 바이든이 상원의원 취임을 포기하려 하자, 밸러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바이든의 집으로 들어와 두 조카를 보살폈다. 바이든은 밸러리의 설득과 헌신적 도움 덕분에 워싱턴 정계로 갈 수 있었다.

밸러리는 바이든이 상원의원에 당선된 직후 교통사고로 아내와 막내딸을 잃자, 남은 두 아들을 돌봐준 ‘엄마’로 변신했다. 바이든 선대위 제공

2년 뒤 바이든이 질 바이든과 재혼했고, 밸러리는 다시 바이든의 최고 참모로 돌아갔다. 바이든이 치른 모든 선거운동에 밸러리가 공식적으로 관여했다. 오직 이번 대선만 밸러리가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밸러리는 이번 대선 출마를 놓고 고민하던 바이든의 마음을 굳히게 한 장본인이었다. 바이든의 숙고가 수개월간 이어질 때, 밸러리는 모든 측근 모임에 참가하며 결속력을 유지시켰다.

바이든은 민주당 대선 경선 초반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대패해 전망이 암울했다. 이때도 남부 주들과 ‘슈퍼 화요일’(가장 많은 주에서 경선을 치르는 화요일)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도 밸러리였다.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바이든을 공격했을 때, 밸러리가 가장 분노했다. 하지만 해리스를 바이든의 부통령 후보로 선정하고, 화해의 자리를 만든 것 역시 밸러리였다.

그늘도 있다. 밸러리의 영향력이 너무 크고, 그 가족들에게 특혜가 돌아가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워싱턴의 ‘책임 및 윤리를 위한 시민들’이라는 단체는 의원들이 가족들에게 지급한 돈의 규모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다. 바이든은 가족에게 가장 많은 돈을 지급한 최상위 5대 상원의원으로 지목됐다. 바이든은 2002년 선거에서 급료로 밸러리에게 5만1286달러, 밸러리의 딸 케이시 오웬스에게 3618달러, 아들인 헌터 바이든의 컨설팅회사에게 3만8974달러를 지급했다.

바이든이 출마한 이번 대선은 밸러리가 그의 선거조직에서 공식직함을 맡지않은 유일한 선거였다. 하지만, 밸러리는 막후에서 선거를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2019년 10월9일 그의 고향인 델라웨어 에이큰 카운티 민주당 행사에서 밸러리가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바이든이 민주당 경선에 나선 지난 2월 밸러리를 다룬 기사에서 “바이든의 인기있는 대리인이자, 그를 위한 효과적인 검증자”라는 측근들의 공통된 평가를 전했다. 바이든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측근 크리스토퍼 쿤 상원의원은 “밸(밸러리의 약칭)은 처음, 중간, 끝까지, 아침, 점심, 저녁까지 거기에 있어왔다”고 밸러리를 평가했다. 대통령이 되는 바이든에게 밸러리가 여전히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지는 바이든 시대의 핵심 변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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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차된차가긁혔어요수리비가1시간전

    바이든의 당선으로 한미일 관계가 엄청나게 달라질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많은데 기본은 전혀 안 달라진다

    답글1댓글 찬성하기32댓글 비추천하기4

  • SWJK1시간전

    미국이 그래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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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미스트리1시간전

    이방카랑은 다르네..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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