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보문사 마애불 옆에 왜 간송 이름이..?

2020. 11. 2. 08:36■ 불교/불교 문화재

강화 보문사 마애불 옆에 왜 간송 이름이..?

노형석 입력 2020.11.02. 05:06 수정 2020.11.02. 07:26

[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이주민 문화재청 감정위원
"1937년 5월 전형필 삼가 절한다"
무심코 지나쳐온 새김 명문서
간송의 불사 관련 후원 증거 찾아

강화 보문사의 마애관음보살좌상. 1928년 석모도 암반의 경사면에 이 마애관음상이 새겨지면서 보문사는 한국의 3대 관음도량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어, 전형필? 간송 선생이네! 이분 이름이 왜 여기 새겨졌지?”

지난해 7월 강화 석모도 보문사에서 기도발 좋은 것으로 이름난 명물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조사하던 이주민 문화재청 감정위원(불교미술사가)은 상 주변 암벽에 새겨진 명문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애상 왼쪽에 뚜렷한 해서체로 1937년 5월에 1906년생 전형필이 향을 사르며 삼가 절한다는 내용을 담은 ‘불기이구육사년정축오월일(佛紀二九六四年丁丑五月日)/ 병오생전형필분향근배(丙午生全鎣弼焚香謹拜)’란 글씨들이 뚜렷하게 오목새김 되어 있었다.

마애관음보살좌상 왼쪽 명문에서 최근 확인된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기록. 1937년 그가 마애불 관련 불사를 후원했음을 알 수 있는 두 줄의 명문 ‘불기이구육사년정축오월일(佛紀二九六四年丁丑五月日)’ ‘병오생전형필분향근배(丙午生全鎣弼焚香謹拜)’가 오목새김 돼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되거나 사장될 위기에 있던 전통 서화와 불상 등의 민족문화유산들을 거액의 사재를 털어 사들이고 지켜낸 대수장가가 뜻밖에도 강화 석모도의 절 한쪽 암벽에 일제 말기 절의 불사를 후원했다는 기록이 소장학자의 눈썰미 덕분에 드러난 것이다. 이 위원은 이 마애불좌상의 건립 내력을 추적한 끝에 간송의 명문과 1928년 건립 경위를 상세히 밝혀 학술계간지 <문화재> 2020년 가을호에 공개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전형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무척 기뻤다”는 그는 이런 소감을 털어놓았다. “큰 마애좌상 바로 옆에 새겨져 누구나 볼 수 있는 명문인데도 그동안 거의 주목하지 않았어요. 일부 보고서에는 명문 이름을 김씨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고요. 왜 이렇게 무관심했는지 사실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

강화도 안쪽 작은 섬 석모도에 자리한 보문사는 불자들한테는 한국 관음신앙의 3대 성지 도량 중 하나로 꼽히는 명찰이다. 다른 성지로 꼽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남 남해섬 보리암에 비해 관음에 얽힌 전설이나 역사적 내력이 화려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성지로 격상된 건 바로 절 들머리 급경사 진 암벽에 1928년 새겨진 근대기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여기에 새겼을까. 이런 자연스러운 의문에 대해 국내 학계는 그동안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강화 석모도 암벽에 관음보살좌상을 새겨 관음성지를 조성하기까지의 경위와 불상을 어떤 공정을 거쳐 조성했는지에 대해 교단은 물론 학계에서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교한 고대 불상과 달리 근대기 불상은 신앙대상 외에는 미술사나 문화유산 맥락에서 별다른 가치가 없다며 외면하는 선입관이 강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대칭만 강조하고 선이 투박하고 단순해 예술성이 없다는 학계 일부 관계자의 폄하도 한몫했다. 이 위원의 발견은 이런 한계 상황을 딛고 절을 수차례 직접 찾아가 직접 암벽을 기어올라 네 부분으로 나뉜 명문을 확인함으로써 길어 올린 값진 성취다.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 주위 네 지점에 나눠 새겨진 명문의 위치를 표시한 사진과 그림. 상의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핵심정보를 담은 ‘시주질’은 참배로 위쪽 암벽에 새겨진 첫번째 명문에, 간송 전형필의 후원 사실은 두번째 명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최근 소장학자 이주민씨의 연구로 밝혀졌다.

<문화재>에 실린 논문을 보면, 구한말 장안의 갑부였던 간송가와 불가의 인연은 간송의 부모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특히 양어머니인 민씨의 불심이 깊어 주도적으로 여러 사찰에 후원하는데, 대표적으로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의 괘불도, 지장시왕도 조성에 전형필과 민씨의 이름을 같이 넣어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보문사 명문에는 민씨의 후원 내역이 없고 ‘전형필’의 이름만 있어 간송의 단독 후원이 분명해 보인다. 마애불 조성 뒤 주변 참배공간을 다듬고 공양구를 새롭게 설치하는 것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 위원은 추정하고 있다. 간송의 스승 격이자 감식안이던 위창 오세창이 이 보문사의 본사 강화 전등사에 주련을 남겼고, 인천 송도에 간송가의 별장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간송이 문화재 수집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강화도 일원의 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이 위원이 밝혀낸 명문 기록에서 마애불 밑그림을 그린 불화승 이화응을 비롯한 금강산 사찰 승려들이 후원금을 모아 건립을 주도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금강산의 불교문화가 강화도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멀리 떨어진 금강산과 강화도의 불교 미술사 교류가 이어진 데는 근대기 금강산 철도의 개설과 금강산의 관광 인프라 구축과 관련이 있다고 이 위원은 고찰했다. 경성에서 금강산까지 이동하는 데 드는 소요 시간이 크게 단축되면서 관광객이 급증했고, 철도 정차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금강산-강화도의 불자들을 잇는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 보문사 마애불 조성의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공중에 드론을 띄워 촬영한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전경. 상 위쪽에 큰 처마바위가 보인다. 여기에 쇠고리와 추를 달아 상을 새기는 작업을 할 때 일종의 기준점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문사 마애좌상은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전형적인 관음보살로 비스듬한 바위 면에 힘들게 깎은 작품이다. 근대 상이지만 제작 기법이나 내력 등에서 주목할 만한 요소가 많다. 방형의 큰 얼굴에 목이 짧고 전체적으로 경직되고 투박한 인상이지만, 최근 소장품 불상의 경매 출품으로 관심을 끈 간송의 생전 유지가 깃든 유적이란 비사가 드러나면서 뜻깊은 사연을 쌓게 됐다. 일일이 암벽을 기어오르며 명문을 확인하고 마애불 위 처마바위에 공사 측량용 쇠고리가 달려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해 알린 소장연구자의 공덕 또한 기억할 일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이주민 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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