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5. 08:29ㆍ■ 스포츠/스포츠 이야기
살 빼러 왔다가..세계 최연소 5.14c 오른 초등생
김홍준 입력 2020.04.25. 00:02 수정 2020.04.25. 07:31
만 12세인 지난 2월 태국 '그리드' 완등
앞으로 기울어진 건물 외벽 오르는 난도
"라면·자장면은 천적" 음식 철저히 가려
33m의 이 루트는 석회암질의 난도 5.14c다. 이 그리드를 경험해 본 경력 20년의 한 클라이머는 “클라이밍에서 곧추선 바위 면이 반반해서 ‘거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리드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했다. 최석문(47·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씨는 “5.14c는 한쪽 팔, 한 손가락만 사용해 턱걸이할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한다”며 “손톱 반만 한 돌기만 잡고 디디며 아파트 18층, 그것도 20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진 곳을 오르는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무엇보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클라이머들도 수년간 공들여 이 그리드를 추락 없이 오르고자 해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Q : 그리드 완등 후 울었다는데.
A : 하강하자마자 엄마와 통화했어요. 엄마가 등반 그만하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으라 하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태국 현지에 가서 열흘간 5㎏ 뺐거든요. 망고찹쌀스테이크가 메뉴로 나온 적이 있는데, 망고는 달아서 안 먹었고 찹쌀 입힌 스테이크만 살짝 떼어먹었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알아서 식단 관리를 했어요.엄마 목소리 들으니 그냥 눈물이 났어요. 제가 좀 잘 울어서….
Q : 외국 클라이머들이 12세가 1m 70cm, 50㎏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2~3년 전 사진 속 이군은 꽤 통통했다. 어머니 박진애(42)씨는 “아이가 미니어처 만들기를 좋아해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걱정될 정도로 살이 붙더라"며 "성격이 위축되는 것 같기도 해서 매달리기라도 시켜 보려고 클라이밍센터를 찾았고 본격 훈련은 지난 2월 기준 14개월째였다”고 말했다.
한만규 센터장은 “학진이가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본인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싶은 게 많은 나이지만 꾹 참는다는 말이다. 이군은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에는 키 1m 30cm인데 체중은 50㎏이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손바닥 반만한 고기 한 토막 먹은 뒤 클라이밍센터에서 오후 늦게까지 강냉이 몇 알만 먹었다. 이쯤 되면 고난의 행군 아닐까. 어머니 박씨는 “분명 힘들 것 같은데 남편과 눈여겨봐도 학진이가 힘들다고 한 적도, 내색을 한 적도 없었다”며 “클라이밍을 하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고 했다. 이군은 영국의 유명 등반가 더그 스콧(79)이 말한 "배가 부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깨친 것일까.
이군은 이날도 한만규 센터장의 과제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는 일주일에 세 차례 6시간씩 훈련한다. 주말에는 자연 바위를 찾는다.
Q : 어린 나이지만, 등반 철학이 있을텐데.
A : 겸손해야 할 것 같아요. 암장에서나, 바위에서나. 그리고 등반하시는 선배님들이 많으니, 인사를 잘해야 하고요. 일상이나 등반 관련해서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군은 이날 훈련 중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를 매번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 짧은 평을 그 옆에 적었다. 한만규 센터장의 훈련법 중 하나다.
Q : 첫 해외 등반에서 5.14c 완등인데, 등반 신동 아닌가.
A : 음, 그 말은 좀…. 제가 신동은 아닌 것 같아요. 신동이라면 세계 최고 난도인 5.15d를 오른 아담 온드라나, 요세미티 엘캐피탄을 로프 없이 등반하는 알렉스 호널드 그런 사람 말하는 것 아닌가요(웃음).
같은 암장의 ‘형님’인 이강륜(17)군도 2년 전에 5.14c를 완등했다. 아시아 최연소였다. 12세 동갑 송윤찬군도 지난해 5.14급을 완등했다. 세 명은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한만규 센터장은 “굳건한 의지와 자기관리가 있어야 하고, 치명적 부상은 없어야 한다"며 "가장 쉬운 숙제이면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시포스는 오늘도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옮기다 떨어뜨리고 있다. ‘반복’이라는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이를 넘으려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이제 만 13세. 이학진군은 시시포스로 살지, 이를 거부할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그는 다시 홀드의 난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셋이 함께 올림픽 나가고 싶은데, 남자 티켓이 2장뿐이라 어쩌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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