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엄한 미술관에 내걸린 '짤방'.."장난하나" vs "어려워야 예술인가"

2019. 11. 27. 20:22■ 문화 예술/축제 행사 전시

근엄한 미술관에 내걸린 '짤방'.."장난하나" vs "어려워야 예술인가"

김보겸 입력 2019.11.27. 15:38 수정 2019.11.27. 16:39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서 '짤방전' 열려
주최 측 "예술 모르는 사람들도 빵 터지길"
관객 참여과정서 불쾌 유발한다는 비판도
27일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짤방전’. ‘궁예 재즈피아노 ver.’이 재생되고 있다. (사진=김보겸 기자)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기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신하를 죽이는 다소 황당한 상황에 배우의 연기와 억양이 어우러져 큰 인기를 얻은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한 장면. 배우의 대사 높낮이에 맞게 피아노 코드를 붙여 연주한 영상이 미술관 한편에서 재생되자 시민들은 폭소했다. 영상 제목은 `궁예 재즈피아노 ver.`이다.

이미지·동영상 등 인터넷 게시물에 들어가는 이른바 `짤방`이 서울 시내 한복판 미술관에서 대거 전시됐다. 주최 측은 ‘어려워야 예술이냐’라며 누구나 와서 웃고 즐기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속어를 남발해 품격을 떨어뜨리고 부적절한 짤방까지 버젓이 전시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감정을 짤방으로 표현하는 ‘짤방 사전’ 코너에서 찾은 ‘경멸’ 짤. (사진=김보겸 기자)


◇새로운 대중언어 ‘짤방’, 미술관에서 전시되다

‘짤방’은 ‘짤림 방지’의 약자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올릴 때 글이 삭제되지 않도록 눈길을 끄는 이미지를 붙인 데서 유래했다. 지금은 표현하고자 하는 맥락이나 감정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나 영상 전반을 통칭한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은 지난 21일부터 ‘불만을 노래하자’는 슬로건을 앞세운 크리에이터 집단 ‘르르르’의 ‘짤방전’을 열고 있다. 27일 방문한 전시장에는 평일 낮 시간인데도 30명정도 관람객이 관람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온 20대부터 40대 중년 부부, 혼자 온 30대 남성 등 연령대도 다양했다.

전시회는 크게 짤방을 재탄생시킨 ‘짤 아트’, 짤방의 역사를 보여주는 ‘짤카이브’, 짤방으로 만든 사전이 있는 ‘짤 딕셔너리 월’ 그리고 관객들이 직접 짤방에 대사를 넣어 나만의 짤을 만드는 ‘짤줍방’ 등 총 4개의 코너로 구성돼 있다.

감정 표현 짤방을 전시해 놓은 ‘짤 딕셔너리 월’ 코너를 둘러보던 성모(28)씨는 “평소 일민미술관을 자주 찾았는데 색다른 전시가 열린다고 해서 왔다”며 “직접 와 보니 가볍고 재미있다. 무거운 주제의 작품만 전시하는 것보다 가끔 이런 기획도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 미술 전시를 별로 즐기지 않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전시를 둘러보던 김경배(24)씨는 “미술에 관심이 없는데 여자친구가 가자고 해서 왔다”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많고 어렵지 않은 주제라 재미있었다”고 평가했다.

대답을 대충 하고 싶을 때 쓰는 ‘이응’ 짤을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둔 모습. 시민들은 짤방의 포즈를 따라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사진=김보겸 기자)


◇“예술 어려워하는 사람들, 미술관으로 초대하고자”

주최 측은 ‘어려워야 예술이냐’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르르르 관계자는 “예술이 너무 어렵다고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이 예술을 좀 더 쉽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시를 열었다”면서 “그 매개체로 짤방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대중들의 순수미술에 대한 관심도는 여전히 낮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8년 문화향수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분의 3이 순수미술을 멀리하고 있다. 지난해 연극·대중음악·무용 등 문화예술행사의 직접 관람률이 처음으로 80%대를 넘었지만, 이중 미술 전시회는 15.3%에 불과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나지 않고 △관심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가 많았다.

르르르 관계자는 “전문 비평가만 예술을 해석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단 보면 누구나 의도를 알 수 있고 ‘빵 터질 수 있는’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개구리 짤방(왼쪽) 원본. 오른쪽은 르르르 소속 작가가 나무 모형으로 짤방을 재현한 모습. (사진=김보겸 기자)


◇“짤방 피상적 재현에 그쳐…웃고 넘기기엔 불편한 짤방도 전시”

이 전시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박모(24)씨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려고 미술관 저질화를 부추기고 있다”며 “품격도 없고 비속어를 남발하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고 저급하다”고 비판했다. 인터넷 상에서 대중들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옮겼을 뿐 정작 전시 주체가 생산한 게 없다는 비판도 있다. 2차원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등 나름의 재창조를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원본의 맥락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그쳤다는 지적이다.

서강대 지식융합학부에서 아트앤테크놀로지를 전공 중인 윤정원(25)씨는 “짤방 전시 자체를 문제삼는 건 아니지만 왜 짤방들이 인기를 얻었는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어 보인다”고 꼬집었다. 윤씨는 “결국 극단적으로 가벼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며 “트렌디한 소재를 가져다가 소비성으로 전시하는 데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관객이 직접 ‘철수와 영희’ 짤방의 대사를 채워 넣었다. 여성 비하적 표현이 담긴 짤방을 버젓이 전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사진=김보겸 기자)

한편 전시가 관객의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명한 짤방 속 말풍선을 관객이 채워 넣도록 하는 코너가 있는데, “이 X이...” 같은 여성 비하성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는 모습도 보였다.

시민 이모(32)씨는 “평소에 저런 농담을 하는 회사 선배가 떠올라 불쾌해졌다”며 “부적절한 표현을 웃음으로 넘어가려는 어른들의 태도 때문에 아이들까지 죄의식을 모르고 따라 쓰게 된다”고 꼬집었다. 이씨는 “선을 넘는 표현은 조치를 취해달라”고 덧붙였다. 르르르 측은 “문제되는 문구가 걸리지 않도록 자정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김보겸 (kimkija@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