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명 죽어나간 지옥..9살 소년은 살아남아 국가에 묻는다

2019. 11. 24. 08:29■ 大韓民國/福祉

뉴스1

531명 죽어나간 지옥..9살 소년은 살아남아 국가에 묻는다

서혜림 기자 입력 2019.11.24. 07:00

형제복지원 증인 한종선씨, 8년째 국회 앞서 진상 규명 외침
"부랑인 정책 피해자들 '30년 악몽' 가해자 국가 해명·책임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가 농성 중이다 © 뉴스1 서혜림 기자

(서울=뉴스1) 서혜림 기자 = 가로 세로 2제곱미터가 안되는 네모난 집. 5센티미터 두께의 스티로폼 미닫이 문이 출구. 강아지 법이와 40대의 사내는 컴컴한 바닥에서 눈을 뜬다. 오전 7시 좋은 냄새가 나는 남녀 직장인들이 그와 강아지 법이를 지나쳐간다. 일어날 시간이다. 움막에선 그리 상쾌하지 않은 땀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후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8년 째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43). 그에겐 12살짜리 누나가 있었다. 9살이었던 종선은 누나와 1984년 부산에서 한부모 가정이라는 이유로 형제복지원에 끌려왔다. 아버지 또한 2년 뒤 경찰에 의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왔지만 서로는 만날 수도, 함께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한번 끌려오면 나갈 수 없고 가족도 볼 수 없는 수용소였다.

28개 소대에 정신병동 3개. 수용자들은 서로를 구타했다. 제일 밑바닥은 소대원, 위에는 조장, 서무, 그리고 소대장과 중대장. 원장은 충성하고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완장을 채워줬다. 완장을 찬 사람은 권력을 쥐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노역을 시키고 밥먹듯 구타했다.

"그래! 옳지, 각을 세워라!"

원장은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 검은 장갑을 끼고 아이들을 데려가곤 했다. 끌려간 아이들은 원장에게 맞았다. 탈출을 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쌀을 담던 마대에 구멍만 뚫어 원생들을 입혀놓고 빨간 글씨로 죄명을 적었다. 모든 원생들 앞에서 신의 이름이라며 구타를 반복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불렀다.

원장 뿐만이 아니었다. 완장을 차지 않은 대원들도 서로를 구타했다. 종선씨는 누나를 지켜줄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던 누나는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국가는 이들을 방조했다. 경찰은 이들을 잡아갔고 법원은 눈을 감고 회피했다. 부랑인이라고 낙인 찍힌 이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원장은 매년 20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아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박인근 원장을 "거리에 거지를 없앤 훌륭한 사람일세"라고 칭찬했다. 원장은 1987년 재판을 받게 됐지만 2년 6개월형만 선고 받고 출소했다. 그는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됐다'는 자기기만적 기록까지 남기고 80세 넘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진구 당감동에 있던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 주민등록증이 없던 사람이나 어린이들을 경찰이 끌고가 넣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3000명이 넘는 이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저항하면 구타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12년 동안 531명이 사망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기를 바랐지만 안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많은 시신들이 전국의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한씨는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8년 전 국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피해생존자모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피해생존자들은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고문과 폭행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무일푼으로 노역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진 곳이 없다. 진상규명을 위한 법을 만들어달라며 농성을, 2년 전부터는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지난 7일 농성장에서 만난 한씨는 가끔 자기 앞에서 숨져가던 또래의 흰자위가 기억난다고 털어놨다. 세월이 흘러도 트라우마는 극복이 되지 않는다. 그 아이의 골이 터져 비릿한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복지원 사람에게 구타당하던 아이가 바들바들 떨다가 일어나지 못했다. 가끔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려낸 그 냄새는 그를 암흑같던 형제복지원의 시공간으로 되돌려보낸다.

"12년 전에 마침내 아버지와 누나를 정신병원에서 찾았어요. 그 후 멍하니 새벽에 TV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나왔어요. 왠진 잘 모르겠는데 처음으로 이 억울함을 정말 말하고 싶어졌어요. 그 길로 여기 오게 됐죠"

그동안 수많은 언론이 형제복지원의 만행을 들춰냈다. 국가인권위원장도, 국회의원도 농성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통한 국가차원의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무일 전 검찰총장도 지난해 11월 대법원에 박 원장이 무혐의 처분을 받은 건에 대해 비상상고했다. 원장은 죽었지만 거리에서 끌려가 무참히 폭행당한 사람들은 아직도 30년 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도 해명을 듣지 못했고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했다.

종선씨는 결국 국가가 가해자며 국가가 이를 인정하고 풀어나가야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가는 왜 부랑인 단속정책을 폈는지, 왜 수사 과정에서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문제를 왜 무죄라고 했는지, 왜 국회는 관련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장은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지요. 목적지는 국가입니다. 부랑인들을 잡아갈 수있게 한 것도 사회정화사업이라는 내무부법령에 의해서 이뤄졌죠. 국가가 만든 제도입니다. 박인근(원장)은 국가차원에서 진행된 모든 일에 중간에서 요령껏 살다 간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형제복지원 사건 등 강제수용 사건을 규명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과거사법)이 2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번 법사위에서 과거사법 안건이 통과되고 본회의에서 의결이 나면 형제복지원에서 억울하게 사망한 513명과 가족을 잃어버린 피해자들을 위해 국가가 처음으로 나서 진상규명을 시작한다.

27일에 이어 12월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되는 날 한종선씨의 한맺힌 바람이 비로서 일부나마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8년 전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 중(노숙농성은 2년째)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와 그가 키우는 강아지 법이 © 뉴스1 서혜림 기자

suhhyerim77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