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8. 11:07ㆍ■ 법률 사회/살인 강도 절도 폭력
이춘재 자백엔 '단발머리'..화성8차 범인 윤씨 조서엔 없었다
최모란 입력 2019.11.18. 06:01 수정 2019.11.18. 06:51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의 한 가정집.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중학생 A양(당시 만 13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듬해 경찰은 A양 집 인근 농기구 수리점에서 일하던 20대 청년 윤모(현재 52세)씨를 이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았다. 경찰관 5명이 윤씨를 검거한 공로 등으로 특진했다. 바로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다.
해결된 줄 알았던 이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된 이춘재(56)가 "8차 화성 살인 사건도 내 소행"이라고 자백하면서 반전됐다. 윤씨는 수원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경찰은 '억울한 옥살이' 논란이 일고 있는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이춘재라고 잠정 결론 냈다. 같은 사건에 대한 두 사람의 진술이 차이를 보였는데 두루뭉술한 윤씨의 자백과 달리 이춘재의 자백은 구체적이고 과거 사건 현장과도 일치했다.
이춘재의 자백엔 있고 윤씨의 경찰 조서엔 없는 것
이춘재는 경찰에 8차 화성 살인 사건 피해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A양이 단발머리였다는 내용 등이다.
그러나 윤씨의 재심 변호인단이 제공한 윤씨의 과거 경찰 조서엔 피해자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은 없다. "방 안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봤다"면서도 "(피해자가) 무슨 옷을 입었고 이불 색은 기억나느냐"는 질문엔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답한다.
변호인단이 공개한 과거 경찰 조서에서 윤씨는 피해자를 "중학생" "여학생" "어린 중학생 타입"이라고만 설명한다.
이춘재는 "대문을 통해 A양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중학교 1년 후배가 피해자 집에 살아서 어릴 적 가 봤다. 이 친구가 이사한 뒤엔 외지 사람들이 와서 사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하며 집 구조 등도 설명했다.
반면 윤씨의 조서엔 "(A양의 집에) 양손을 (조립식 블록) 담 위로 잡고 먼저 발을 올려 넘어갔다"고 돼 있다. 범행 후에도 담을 넘어 도망갔다고 했다. 윤씨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서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담을 넘을 넘기 어렵다. 과거 현장 검증 사진에도 윤씨가 담을 넘으려고 시늉하는 사진만 있을 뿐, 넘는 사진은 없다고 한다.
범행 흔적, 범인은 맨손이 아니었다.
과거 윤씨가 작성한 진술서와 윤씨의 과거 수사 기록 등을 보면 윤씨는 '맨손'으로 범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갑 등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윤씨는 "(피해자 방) 문을 열고 보니 책상이 하나 있고 여학생이 자고 있길래 책상을 맨발로 넘어들어갔다"고 했다.
과거 현장 검증 사진에는 윤씨가 책상을 두 손으로 짚은 채 불편한 다리로 책꽂이가 올려진 책상을 올라가는 모습이 담겼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 윤씨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춘재는 경찰에 "양말을 손에 낀 상태로 범행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범행 당시 사진을 재감정 의뢰한 결과 "A의 시신에서 발견된 범행 흔적이 맨손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고 한다. 천에 의한 쓸림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뒤집어 입은 속옷은 결정적 증거
윤씨는 과거 수사 당국에 "A양의 옷을 무릎까지 내려 범행한 뒤 다시 입혔다"고 했다.
이춘재는 "옷을 모두 벗기고 범행을 한 뒤 다른 속옷 등을 입히고 집을 빠져나왔다. A양의 속옷은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버렸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경찰이 과거 범행 현장 사진을 확인한 결과 A양이 속옷을 뒤집어 입고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 수사 기록엔 A양이 속옷을 뒤집어 입었다는 부분이 없었는데 현장 사진 등을 확인해 본 결과 속옷을 뒤집어 입을 것을 확인했다"며 "중학생인 피해자가 속옷을 거꾸로 입었다고는 볼 수 없어 '옷을 무릎까지 내려 범행을 했다'는 윤씨의 진술보다는 '모두 벗기고 다른 속옷으로 다시 입혔다'는 이춘재의 자백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이춘재를 8차 화성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윤씨의 재심 개시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김병찬 부장판사)는 윤씨가 청구한 재심 개시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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