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선생님이 극찬한 도시인데... 이렇게 변했어요

2024. 7. 30. 20:45■ 불교/불교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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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선생님이 극찬한 도시인데... 이렇게 변했어요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 친환경 여행, 도시 탐방, 반려동물과 함께 보내는 휴가, 오토바이 여행, 숨겨진 명소 등 다양한 형태의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국민휴가위원회'가 나섭니다. 무더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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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선생님이 극찬한 도시인데... 이렇게 변했어요

윤찬영2024. 7. 30. 11:21

 
[2024 공동리포트 - 국민휴가위원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게 보내는 공개 초대장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 친환경 여행, 도시 탐방, 반려동물과 함께 보내는 휴가, 오토바이 여행, 숨겨진 명소 등 다양한 형태의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국민휴가위원회'가 나섭니다. 무더위와 고물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편집자말>

[윤찬영 기자]

 
  미륵산을 배경으로 두 개의 석탑이 우뚝 서있는 미륵사지 풍경
ⓒ 윤찬영
"그렇게 보고 또 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곳이 답사의 명소이긴 명소인가보다. 그러나 미륵사터를 스치듯 들러가는 곳으로만 삼았다는 것은 그 존대한 유적에 참으로 큰 실례를 범한 것이었다. 익산 미륵사터는 결코 그럴 곳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王都)의 꿈이 서린 곳이며, 한국미술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석탑의 시원양식이 지금도 그곳 폐허 속에서 금자탑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 선생님, 이 글을 기억하시는지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4년, 선생님께서 익산 미륵사지(터)를 다녀오신 뒤에 쓴 글입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 실려 있죠.

선생님의 글을 읽고 3년 전 겨울, 어느 이른 아침에 처음으로 미륵사지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드넓은 절터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 한없이 맑은 고요를 행여 깨지나 않을까 발목까지 소복이 쌓인 눈을 소리 죽여 밟아가며 한 발 한 발 저 멀리 우뚝 선 석탑을 향해 내딛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마침내 석탑 앞에 서자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웅장함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이 서려있다는 것도, 석탑의 시원양식이 새겨진 것도 그땐 미처 몰랐지만 그저 넋을 잃고 한참을 탑 앞에 서 있었죠. 아는 이 한 명 없던 이 도시, 익산에 살기로 마음먹은 것도 아마 그날의 경험이 한몫 했을 겁니다.

미륵사지,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바람에 본래 모습을 잃었던 미륵사지석탑
ⓒ 국가유산청
 
 
  20년간의 해체 수리를 거쳐 되살아난 미륵사지석탑. 새롭게 태어난 지 겨우 5년이 지났다.
ⓒ 윤찬영
   
선생님, 보고 또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던 그 답사의 명소가 지난 30년 사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선생님께서 글을 쓰신 5년 뒤인 1999년 4월, 문화재위원회는 미륵사지석탑을 해체·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조 안전 진단을 해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이부었던 콘크리트가 부식되었고, 또 석재의 균열도 심해져 탑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어려운 작업은 탑에 두텁게 덧씌워진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100년 가까이 탑과 붙어있던 콘크리트를 탑에 흠집을 내지 않으면서 떼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치과용 드릴을 가져다가 3년을 매달린 끝에 흉물스럽던 콘크리트를 모조리 없앨 수 있었습니다.

1층 심초석을 덮고 있던 돌을 들어 올린 건 복원을 결정한 지 1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2009년 1월, 심초석의 십(十)자형 공간에서 사리장엄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무려 1400년 만에 말이죠.

선생님께서 2011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 개정판을 내면서 "서(西)탑 해체 중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주는 삼국시대 금속공예의 최고 명작 중 하나다"라고 덧붙이실 만큼 의미 있는 발견이었습니다.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 국가유산청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고 다시 10년이 지난 2019년 4월 30일, 마침내 미륵사지석탑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해체·수리 결정이 내려진 지 꼭 20년 만이었습니다. 이로써 미륵사지석탑은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오랫동안 보수작업을 거친 석탑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도 같은 해에 문을 열었습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시설의 절반 이상이 땅 밑에 자리한, 이른바 '보이지 않는 박물관(invisible museum)'입니다. 미륵사지가 오랜 세월 간직해온 본연의 아름다움을 행여라도 박물관이 해치지 않도록 한 배려입니다. 이런 박물관은 우리나라에 하나뿐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국립익산박물관. 나지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게 박물관의 지붕이다. 가운데 보이는 내리막길 끝에 박물관 입구가 있다.
ⓒ 국립익산박물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백제 왕궁터

익산 왕궁리유적(왕궁터)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976년에 발굴의 첫 삽을 뜨긴 했지만,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서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대대적인 조사에 뛰어들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백제의 왕궁터인 줄도 몰랐으니까요.

드넓은 왕궁의 윤곽과 함께 금과 유리를 생산한 공방, 대형 화장실과 배수로 그리고 기이한 돌들로 꾸민 정원 등이 발견된 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였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왕궁의 규모는 궁을 둘러싼 궁장(성벽)을 기준으로 동서 방향으로 약 240m에 남북 방향으로 약 490m입니다. 고대 왕궁이 이렇듯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익산왕궁리유적의 모습. 왕궁리5층석탑의 모습이 보인다.
ⓒ 국가유산청
 
 
  옛 왕궁의 화장실과 배수로를 복원한 모습
ⓒ 윤찬영
 
 
  수도를 가리키는 '수부(首部)'가 새겨진 기와조각들
ⓒ 국가유산청
     
2022년엔 백제왕궁박물관이 새 단장을 거쳐 문을 열었습니다. 전시실 맨 앞엔 '수부(首部)' 두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비도읍기 왕궁터로 알려진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것으로,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또 2017년엔 같은 기와가 익산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익산토성'에서도 발견되면서 익산토성이 왕궁을 지키는 성곽임이 드러났습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은 다행히도 도시화의 거센 흐름으로부터 어느 정도 비껴서 있으면서 지금도 수천 년 전의 풍광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글에 "폐허"라고 쓰신 것도 그래서일 테죠. 30년 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들이 지금은 단정하게 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은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관북리유적 등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익산왕릉원 중 무왕릉의 내부 모습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익산 왕릉원'(옛 쌍릉)도 눈 여겨봐야 할 유산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아무렇게나 파헤쳤던 두 무덤을 100년 만인 2017년에 다시 발굴했고, 이때 대왕릉 안에서 일본인들이 나무상자에 아무렇게나 담아둔 누군가의 뼛조각들이 나왔습니다.

그것들을 분석해보니 무덤의 주인공은 50살이 넘는 남성에 키는 161-170cm, 사망한 때는 620-659년인 걸로 밝혀졌습니다. 백제 30대 무왕이었죠. 고대 국가의 왕들이 통치하던 지역에 묻히곤 했다는 점에서 무왕(과 그 왕비)의 릉이 익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곧 이곳이 무왕 통치기 왕이 머물던 수도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최근의 고고학 발견이 가리키는 새로운 진실들

안타깝게도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엔 무왕이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10세기 무렵 쓰인 <관세음응험기>라는 책에 "백제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익산)로 천도하여 새로 정사를 경영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긴 하나 역사서가 아니라서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왔습니다.
 
 
  제석사지에서 발굴된 폐기유적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하지만 최근 천년 넘게 땅속에 묻혀있던 '증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제석사지와 제석사 폐기유적이 발견된 것도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관세음응험기>엔 "정관13년 기해(639년) 11월 하늘에서 큰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화재를 입어 불당, 칠급부도(7층목탑), 낭방(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적혀있는데, 실제로 제석사 절터와 함께 벌겋게 불에 탄 기와를 비롯한 온갖 건축 폐기물이 묻힌 유적이 발견되었으니까요.

발굴팀은 이곳을 639년 제석사가 불에 타면서 나온 폐기물을 묻은 폐기장 유적으로 결론 지었고, 이로써 <관세음응험기>에 적힌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익산토성의 모습
ⓒ 국가유산청
   
최근 십수 년 사이 이토록 극적인 발견들이 잇따라 일어난 도시가 또 있을까요. 이제 익산은 왕궁과 사찰, 왕릉과 성곽까지, 고대 도성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도시임이 드러났고, 여기에 더해 역사문화적 경관마저도 온전히 살아있는 도시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에 얽힌 고대사는 다시 쓰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무왕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을 끝으로 백제는 망국의 길로 빠지고 말았으니까요. 무왕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19년 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새 왕궁을 짓고, 30년 넘는 세월을 바쳐 국가 사찰을 세우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그 원대했던 꿈마저 잊혀선 안 되겠습니다. 이제라도 익산이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에 걸맞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유홍준 선생님을 올 여름 익산으로 초대합니다. 아울러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 여러분도 함께. 14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백제 무왕의 못 다 이룬 꿈을 만나보기 바랍니다.

[관련 정보]
- 서울 용산역에서 익산역까지는 호남선 고속열차로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익산역 근처에서 공유차량을 빌리면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까지 30분이면 닿는다.

- 백제의 익산 천도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익산을 별도, 행궁, 이궁, 별부로 보기도 하고, 익산 천도를 계획했으나 실제 단행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에서 '익산 경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 백제왕궁박물관은 국립익산박물관과 달리 어린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췄고, VR(가상현실)과 디지털·영상 기술로 백제 왕궁과 정원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등 고대사에 한 발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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