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 아버지 유언에도 돌아왔다…태백 최후의 광부 삼형제

2024. 6. 5. 11:45■ 인생/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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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아버지 유언에도 돌아왔다…태백 최후의 광부 삼형제

광부였던 아버지는 생전 삼형제에게 “태백을 떠나라”고 했다. 평생 검은 탄을 캐내 삼형제를 먹이고 입히고 길러냈지만 자식들은 광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국 탄가루가 폐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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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아버지 유언에도 돌아왔다…태백 최후의 광부 삼형제

장서윤2024. 6. 5. 05:01

광부였던 아버지는 생전 삼형제에게 “태백을 떠나라”고 했다. 평생 검은 탄을 캐내 삼형제를 먹이고 입히고 길러냈지만 자식들은 광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국 탄가루가 폐세포마다 붙어 폐를 굳게 만드는 진폐증에 걸려 환갑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62년부터 강원도 태백에서 광부로 일했던 고(故) 김만조(1938~1996년)씨의 아들 김영구(53)·김석규(52)·김영문(47)씨 삼형제를 지난달 29일 갱구 앞에서 만났다. 운명일까. 1998년 맏형 영구씨부터 삼형제는 차례로 아버지처럼 광부가 됐다. 이제는 6월 30일 폐광하는 탄광의 마지막 광부다.

지난 3일 장성광업소 장성갱구 앞에서 마지막 광부 삼형제가 광차를 타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탄광인 장성광업소는 오는 6월 말을 끝으로 폐광한다. 왼쪽부터 막내 김영문(47)씨, 큰형 김영구(53·위쪽)씨, 둘째 김석규(52)씨. 사진 김영문씨 제공

장성갱구(坑口·갱도의 입구) 오른쪽에는 “오늘도 무사히”란 세로 푯말이 붙어 있다. 갱도를 100m 정도 더 들어가면 안전장구 보관 창고 벽에 활짝 웃으며 교대하는 광부들의 걸개그림과 그 아래 ‘수고했어요’ ‘수고해요’ 문구가 적혀 있다. 그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땀 흘렸던 광부들에게 건네는 작별인사처럼 느껴졌다.

장성광업소는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광구일람에 따르면 1921년 1월 삼척탄광 도계광업소 산하 장성갱으로 개광했다. 대한석탄공사는 1936년 11월 생산을 시작한 것으로 본다. 해방 이후 석탄공사 산하 장성광업소로 한 해 최대 227만t(1979년)을 생산한 국내 최대 규모 탄광이었다. 103년 만의 폐광을 앞두고 지난 3월 말 채굴 작업을 중단했다. 영구씨 삼형제를 포함해 346명의 최후의 광부들은 이달 말 모두 일자리를 잃는다.

오는 6월 말 문을 닫는 강원 태백 장성광업소의 갱구(坑口, 갱도의 입구). 장성광업소는 지난 3월 말 채탄 작업을 중단해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썰렁한 모습이다. 옆에는 ‘수고했어요!’ ‘수고해요!’ 문구와 함께 환하게 웃는 광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장서윤 기자


석탄공사는 6월 장성광업소에 이어 내년 삼척 도계광업소(광부 275명)의 문을 닫는다. 두 광산이 폐광되면 석탄공사는 국내 석탄 채굴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민영 광산인 삼척 상덕광업소(광부 600명) 한 곳만 남게 된다. 한때 ‘산업 전사, 우리는 보람에 산다’던 광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도 머지않은 미래다.


아버지 이어 장성광업소 지킨 ‘최후의 광부’ 삼형제


삼형제도 사실 아버지의 생전 당부처럼 광부로 살지 않기 위해 장성한 뒤 뿔뿔이 외지를 향해 태백을 떠났다. 영구씨는 울산에서 배관 용접일을, 둘째 석규씨는 김해에서 신발 공장일을, 셋째 영문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자동차 키박스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이들을 고향으로 다시 불러모은 건 IMF 외환위기였다. 각자 외지에서 가족을 부양하기에 삶이 너무 팍팍했다.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은 삼형제지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장남 영구씨부터 갱도로 들어갔다. 영구씨는 “당시로선 먹고 사는 게 급해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며 “‘문 닫고 나가자’며 마지막 광부가 되기로 결심한 지도 벌써 26년이 지났다”고 씁쓸해했다. 먼저 정착한 영구씨가 이후 다른 직장을 찾고 있던 동생들을 불러모았다.

장성광업소 광부 삼형제가 지난 3일 갱구 앞에서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애환도 많았지만 일단 안 다치고 졸업해서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석규(52), 김영구(53), 김영문(47)씨. 사진 김영문씨 제공

삼형제가 장성광업소를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석탄광산이 완전히 사양산업이 된 뒤였다. 막내 영문씨는 1986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채탄을 기하급수적으로 줄이기 시작한 지 18년이 지난 2004년 장성광업소로 입사했다.

장성광업소 직원 수는 1970년대 전성기에 6000명에 달했다가 영문씨가 입사할 때 이미 1174명으로 줄어있었다. 이어 10년 만인 2014년엔 661명으로 다시 반토막이 난 뒤 현재 346명의 광부를 포함한 413명에 이르렀다. 영문씨는 “3~5년 있으면 끝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계속 폐광이 연기가 됐어요. 그냥 끝까지 남아서 이 일을 마지막까지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라고 했다.

김영옥 기자


그래서일까. 이들의 광부로서 자부심의 원천도 ‘증산보국(增産報國)’ 같은 거창한 옛날식 구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문씨는 “내가 캔 석탄으로 서민들이 지금껏 따뜻하게 지냈고 맛있는 고기도 구워 먹어 떳떳하다. 남에게 나쁜 짓 안 하고 돈 벌어서 아이들 이름으로 기부도 하고 있다”며 “석탄은 내게 ‘고생 덩어리’면서도 ‘따뜻한 덩어리’이기도 하다”고 했다.


“매일 소주 2병 이상은 마셔야 잠 이뤄”

장성광업소의 삼형제 광부가 2007년 KBS 교양프로그램 ‘인간극장’에 출연한 모습. 이들은 술을 마시며 “마지막 광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영구(53), 김영문(47), 김석규(52·오른쪽 맨 끝)씨. 사진 KBS ‘인간극장’ 캡처
담담한 듯 말했지만 삼형제는 지금도 매일 소주 2병 이상을 마셔야 잠에 들 수 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펑’ 터지는 가스 소리, ‘콰르르’ 암석 떨어지는 소리, 죽탄(석탄과 물이 뒤섞여 죽처럼 된 것)에 발이 빠지는 느낌이 그들을 덮치기 때문이다. 죽탄에 매몰돼 사망하는 일은 탄광에서 가장 흔히 일어나는 사고 중 하나다. 맏형 김영구씨와 둘째 김석규씨도 4년 전 죽음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와 살아남았다.

영구씨는 “깊은 갱도에서 채탄 작업 도중 수맥이 터져서 죽탄이 밀려오는데 한 150m를 뛰어나가니 다리가 탁 풀리면서 일어나질 못하겠더라. 나중에 그 작업소를 다시 살린다고 죽을 치우는데 6개월 넘게 걸렸다. 만약 거기 갇혔으면 6개월 동안 화석이 됐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채탄 현장에는 예측 불가한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장성광업소에서 사망한 사람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18명. 가스 질식, 죽탄 매몰, 광차(광석을 나르는 뚜껑없는 화차)·축전차 몸 끼임 사고 등 사망 원인은 다양하다. 방금 전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사라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도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동료의 죽음을 잊고, 잠자고, 다시 갱도에 들어가기 위해 술이 필요했다.

김영구씨가 말했다. “어젯밤 같이 술을 마시다가 오늘 (채탄장에) 들어가서 뭐 사고 났다 이러면 뭐 얼만큼 다쳤어? 그것부터 물어보거든요. ‘몰라. 그냥 실려 나갔어’ 이러면 그냥 짐작하는 거죠. 웬만해선 얘기를 안 해요. 사람들이 또 신경 쓰여서 다칠까 봐. 그냥 다음날부터 안 보이면 죽었구나 했죠.”

지난달 29일 강원 태백 장성광업소 내 창고에서 김영문(47·왼쪽부터)·김영구(53)·김석규(52)씨가 함께 일한 지난 20여년을 회상하고 있다. 장서윤 기자


막내는 45살, 폐광에 일자리 잃는 광부들 막막한 삶

장성광업소에서 광부 이기범(57)씨가 36년째 쓴 안전모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이씨의 안전모는 다른 광부들의 것과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장서윤 기자
장성광업소의 마지막 광부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이기범(57)씨는 막장 안의 ‘큰형’이다. 1989년 광부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36년째다. 이씨는 “우리 동료들은 회식을 그렇게 자주 해도 술 먹다가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늘 서로 도와가면서 일했다”고 자랑했다. 그런 이씨는 요즘 어린 동생들이 걱정이다. 이씨는 “우리 막내가 45살인데 이제 그 친구들이 어디 가서 할 게 없다”며 “나는 몸이 다 고장 나서 더 일할 수도 없지만, 일자리가 생기면 젊은 친구들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장성광업소 광부의 평균 나이는 53세. 아직 어린 자녀를 둔 광부는 346명 중 70~80명이라고 한다, 막장 진입 광부 중에선 많아야 20명 정도라고 한다. 강원도는 이들을 상대로 지게차 운전, 용접 등 재취업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광부들은 하지만 “현장에선 초보는 잘 안 쓴다”니 걱정한다. 태백시는 지난달 31일 고용노동부에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신청했다.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되면 생활안정자금, 전직·창업 지원, 고용촉진지원금, 맞춤형 일자리사업 등에 연간 최대 300억원의 국비가 지원된다.

지난 3월 29일 강원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직원들이 마지막 채탄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광산이 사라져도 기억에는 남았으면”


이기범씨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냥. 우리가, 광산이 사라지더라도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 바람 중 하나는 광부들이 매일 같이 오간 지하 900m 깊이의 수직 엘리베이터(수갱)를 보존해달라는 요구다. 장성광업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갱을 2개나 보유하고 있고 길이도 가장 길다. 하지만 수갱은 물론 모든 지하 공간은 폐광 이후 수몰 절차를 밟는다. 태백시도 문화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정부에 보존 요청을 했지만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광해광업공단은 경제적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장성광업소 수갱(수직 엘리베이터) 앞에 광부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장성 수갱은 지하 900m의 깊이의 수직 엘리베이터로 국내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길다. 사진 독자 제공


장성광업소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려는 노력도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광부의 아들이자 사진작가인 박병문(65)씨는 10년 전부터 광부들과 함께 막장 안으로 들어가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다. 지난달 15일부터는 보름간 전시회도 열었다. 박씨는 “처음에는 카메라를 들으면 기겁할 정도로 (광부들이) 욕을 해서 찍지도 못했지만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설움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광부들은 예부터 새까맣게 덮인 얼굴 때문에 사진 촬영을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박병문 사진작가(65)가 사진에 담은 장성광업소의 마지막 광부들. 사진 박병문 사진작가 제공

장성 광부들이 직접 자그마한 박물관도 만들고 있다. 지난 3일 광부들은 광업소 내 창고에 간이로 만든 나무 레일 위로 막장에서 쓰던 채준기(탄층을 파내는 장비), 사이드 덤프 로더(갱 안에서 돌을 실어나르는 장비), 광차 등 중장비들을 하나둘 올려놓았다. 철제 선반에는 매일 쓰던 안전등과 안전모, 구호 장비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 폐철 고물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유물로 기억됐으면 하는 게 마지막 광부들의 바람이다.

장성광업소 내 광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있는 작은 박물관. 선반에는 안전등, 구호 장비, 가스 측정기 등 매일 썼지만 곧 유물이 될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사진 독자 제공

태백=장서윤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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