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 군위군

2023. 7. 1. 23:56■ 大韓民國/지방 자치

대구광역시 - Daum 백과

대구광역시

大邱廣域市달구벌, 대구
 

시대위치유형면적분야

현대
경상북도 남부
지명/행정지명ˑ마을
883.52㎢
지리/인문지리

요약 한반도 동남부 내륙, 경상북도 남부에 위치한 광역시.

개관

동쪽은 경상북도 경산시, 서쪽은 경상북도 성주군과 고령군, 남쪽은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 창녕군, 북쪽은 경상북도 칠곡군과 군위군 및 영천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8'∼127°00', 북위 35°03'∼35°15'이다. 면적은 883.54㎢이고, 인구는 248만 9802명(2018년 기준)이다. 행정구역으로는 7개 구, 1개 군, 6개 읍, 3개 면, 139개 행정읍 · 면 · 동(290개 법정동 · 리)이 있다. 시청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및 북구 연암로 40(산격청사)에 있다.

자연환경

지형은 분지(盆地)적 지형으로서 남부 산지, 북부 산지, 중앙부와 서남부 저지(低地)로 이뤄져 있다. 북부 산지는 거대한 팔공산괴(八公山塊)로서 중생대 백악기 말에 경상누층군이 퇴적된 후에 이를 뚫고 관입한 불국사화강암(佛國寺花崗岩)으로 형성된 산괴이다.

팔공산괴는 안심(安心)의 동북쪽 초례봉(礁禮峯, 636m)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환성산(環城山, 808m) · 능성(能城)고개(310m), 갓바위로 유명한 관봉(冠峯, 852m) · 노족봉(老足峰, 887m) · 동봉(東峯, 1,156m) 등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서쪽으로 팔공산 주봉(主峯, 1,193m) · 서봉(西峯)을 거쳐 가산(架山, 901m)에 이르는 동서 방향의 장축 약 24㎞에 달하는 산지이다.

남부 산지는 백악기 말에 화산 분출로 생성된 안산암 · 안산반암 · 안산암질 각력암 등의 화산암으로 형성된 비슬산괴(琵瑟山塊)와 용지산괴(龍池山塊)로 이뤄져 있다. 비슬산괴는 달성군 유가면과 가창면 사이에 위치한 비슬산의 최고봉인 대견봉(大見峯, 1,084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청룡산(靑龍山, 794m) · 산성산(山城山, 653m) · 앞산(660m), 남쪽으로는 조화봉(照華峯, 1,058m) · 비티재(310m), 동쪽으로는 헐티재(500m) · 최정산(最頂山, 886m) · 우미산(牛尾山, 636m) · 삼성산(三聖山, 663m) · 팔조령(八助嶺, 360m) 등으로 이어지는 산이다. 용지산괴는 수성구 범물동 남쪽의 용지봉(628m)에서 남쪽 방향으로 병풍산(屛風山, 523m) · 동학산(動鶴山, 570m) · 상원산(上院山, 670m)으로 연결되는 산지이다.

남부와 북부의 산지 사이에 해당하는 동서 방향으로 넓은 중앙부와 낙동강(洛東江) 연변의 서남부는 거의 대부분이 평야이고,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즉, 낙동강과 그 지류인 금호강(琴湖江) 및 이에 유입되는 신천(新川)과 팔거천(八渠川) 주변에는 범람원(氾濫原) 성격의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중앙부의 일부 지대는 준평원상의 침식평야와 두리봉(斗里峰, 215m) · 모봉(母峰, 151m) · 형제봉(兄弟峰, 195m) 등의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서쪽의 일부 지대도 준평원상의 침식평야와 두류산(131m) · 와룡산(臥龍山, 300m) · 궁산(弓山, 253m) 등의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대구는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륙분지지역으로 한서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비교적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한다. 특히, 1942년에 기록한 대구의 최고기록기온 40˚C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연평균 기온은 13.9˚C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052㎜이다.(2007~2016)

역사

대구 지역에 최초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달서구 월성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유적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금호강과 그 지류에 자연발생의 취락이 형성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생활무대에 확대됨에 따라 사회공동체가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청동기시대 유물로 중구 대봉동 지역에서 간돌검 ·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민무늬토기와 홈자귀 · 반달형돌칼 등의 유물이 북구 침산(砧山) · 연암산(燕巖山)의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다.

대구사회의 발전상황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무덤유적을 통해 볼 때, 지석묘축조시대 · 석관묘축조시대 · 석곽묘축조시대 · 석실분축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운동이 일어나 하나의 소국(小國: 城邑國家)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소국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변진 24국 가운데 하나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며, 사로국이 성장해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거기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261년(점해이사금 15)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면,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늦어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까지는 신라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군현체제하의 대구는 위화군(喟 火郡)과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나누어져 통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위화군이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大丘縣)으로 개명되었다. 신라시대에 대구가 정치적 요지로 기능했던 사실은, 신라 5악 가운데 부악(父嶽: 八公山)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나, 689년(신문왕 9)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했던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대구지역은 후삼국의 쟁패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무대가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신라시대와는 달리 그 비중이 점차 낮아져갔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壽城郡) · 대구현 · 해안현(解顔縣)으로 나누어져, 수성군이 대구현을 영속하고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의 영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1018년(현종 9)의 전국적인 군현 개편과정에서 수성군과 해안현은 동경(東京)의 속군 · 속현이 되었고,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14속현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그 뒤 약 1세기가 지난 1143년(인종 21)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되어 점차 그 지위를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12세기에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 · 밀양 ·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몽골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몽고의 제5차 침입 때는 대구지역 주민들이 공산성(公山城)에 입보(入保)해 끝까지 저항하는 항몽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려 말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낙동강 · 금호강으로 바다와 연결된 대구도 두세 차례의 약탈 피해를 입었다.

조선 건국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거읍(巨邑)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394년(태조 3)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게 되었고, 1419년(세종 1) 대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마침내 도호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영남 내륙교통의 요지로서, 또 진관체제(鎭管體制) 하의 용양위(龍驤衛)의 중부가 설치된 군사적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지니게 된 대구는 서거정(徐居正)과 같은 문장가와 정치가를 배출했으며, 많은 학자 · 문인이 나와 영남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곳 출신 사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구부는 해안현 · 하양현(河陽縣) · 경산현(慶山縣) · 수성현 · 화원현(花園縣) · 하빈현(河濱縣)을 포괄하는 거읍이 되었다.

수세기 동안 경상도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의 중심지 위치를 누려왔던 대구는 1895년에 시행된 지방관제의 개혁에 따라 변화를 맞게 되었다. 경상도가 4부(대구부 · 안동부 · 진주부 · 동래부)로 분할되자, 대구지역도 대구군으로 개편되어 부청 소재지가 되었고, 대구부의 관할구역도 23군으로 축소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가지 일대를 포괄해 대구부로 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1899년 달성학교(達城學校)를 효시로 다수의 초등교육기관이 생겨났고, 1906년 계성학교(啓聖學校)가 설립되어 이듬 해 개교한 신명학교(信明學校)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어 교육 · 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근거지로서 한몫을 하였다. 근대적 교육을 통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고, 1907년 서상돈(徐相敦) · 김광제(金光濟)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府)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3 · 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의 시위를 주도했고,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지속했으며, 1930년대 이후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귀환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고, 이에 따라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미군정이 지속되던 1946년 10월 1일 좌익의 교묘한 선동에 의해 이른바 10월항쟁(이칭별칭: 10 · 1폭동. 대구십일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뒤 진압되었다. 이러한 좌익에 의한 혼란을 극복하면서 1949년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 · 25전쟁 과정에서는 낙동강방어작전의 군사적 중심도로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가 노골화되어갈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 · 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했고, 그것은 그 뒤 4 · 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1981년달성군의 월배읍 · 성서읍 ·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해 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1일에는 달서구가 설치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이 변동되거나 조정되었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로 개칭되고, 3월 1일에는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하면서 시역이 크게 늘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유물 · 유적

대구의 선사유적으로는 달서구 월성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유적 그리고 북구 서변동과 수성구 상동지역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물과 유적은 대구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금호강과 신천 유역에 있는 북구 침산동 · 산격동 · 검산동의 낮은 언덕에 청동기시대의 표식유물인 민무늬토기와 각종 마제석기가 산포하는 유적이 있다. 또 중구 대봉동, 수성구 상동, 동구 율암동 · 동내동, 수성구 월성동, 달서구 진천동 등지의 낮은 지대에는 당시 묘제인 지석묘군이 분포한다.

초기 철기문화 단계였던 원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수성구 만촌동, 동구 신천동, 서구 평리동에 청동기일괄유물출토유적이 있다. 그리고 중구 달성동, 북구 팔달동, 동구의 안심동에는 이 시대의 표식토기가 되는 와질토기와 김해식토기 포함층 유적이 있다.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대구 불로동 고분군(사적, 1978년 지정)과 수성구의 사월동 지석묘군(대구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이 있다.

산성으로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구 달성동의 대구달성(사적, 1963년 지정), 동구 봉무동의 봉무토성(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 등과 검단토성을 비롯해 삼국시대 전성기의 도동 용암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 남구 대명동의 대덕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 북구 노곡동의 팔거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과 고산토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구부성과 관련해 수성구 만촌동의 대구부 수성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영영 축성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동화사(桐華寺) · 파계사(把溪寺) · 북지장사(北地藏寺) 등이 유명하다. 동구 도학동 동화사에는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금당암 동 · 서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 동화사 대웅전(보물, 2008년 지정) · 동화사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 동화사 부도군(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 동화사 수마제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이 있다.

도학동에는 북지장사 지장전(보물, 1984년 지정) · 북지장사 삼층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사명당대장진영(보물, 2006년 지정) · 부도암 부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 등이 있다.

동구 중대동 파계사에는 대구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989년 지정) · 파계사 원통전(보물, 2014년 지정) · 파계사 설선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파계사 산령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파계사 적묵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파계사 진동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파계사 기영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있다.

또한 용수동의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신무동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송정동 석불입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등이 있다.

경북대학교 구내에는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보물, 1963년 지정)과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보물, 1963년 지정), 백지은니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0(보물, 1963년 지정) ·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 봉화 북지리 석반가상(보물, 1989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도학동의 대구 도학동 승탑(보물, 1975년 지정), 남구 봉덕동의 법장사 삼층석탑(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동구 신무동의 부인사 서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 부인사 부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 부인사지(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 · 부인사 일명암지 석등(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과 신무동 마애불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중구 남산동의 대구향교와 대구향교 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동산동의 구암서원 숭현사(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북구 읍내동의 칠곡향교와 칠곡향교 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동구 봉무동의 독암서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수성구 성동의 고산서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동구 도동의 문창공 영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 문창공 영정(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중구 미대동의 성재서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누정으로는 중구 포정동의 선화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징청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동구 봉무동의 봉무정(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중구 달성동의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동구 평광동의 첨백당(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수성구 만촌동의 독무재(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 하효자 정려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상동의 야수정(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동구의 둔산동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사당(중요민속문화재, 1982년 지정) 등이 있다.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해, 기타 유적으로는 신라시대 제방축조와 관련된 대구 무술명 오작비(보물, 1969년 지정) 등이 있다. 동구 지묘동의 신숭겸장군 유적(대구광역시 기념물, 1982년 지정)이 있고, 달서구 상인동에는 화원 우배선 의병진 군공책 및 관련자료(보물, 2002년 지정)가 있다.

서울 명동성당과 동일한 형태의 대구 계산동성당(사적, 1981년 지정), 중구 동산동의 선교사 스윗즈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 선교사 챔니스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 선교사 블레어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남산동의 성유스티노 신학교(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 샬트르성바오르 수녀원 코미넷관(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 성모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남성로에는 대구 제일교회(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등이 있다.

대봉동의 건들바위(대구광역시 기념물, 1982년 지정), 달서구 신당동 석장승(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1986년 지정)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동구 도동에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이 있고, 내곡동의 내곡 모감주나무 군락(대구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북구의 국우동 탱자나무(대구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고산농악(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과 날뫼북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 · 욱수농악(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8년 지정) · 천왕메기(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9년 지정) · 가곡(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9년 지정) · 영제시조(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0년 지정) · 공산농요(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0년 지정) · 판소리(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 · 살풀이춤(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5년 지정) · 대고장(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이 전승되고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다. 현존하는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 부동2리(지금의 동성로)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599년(선조 32) 달성공원 남각에 재현하였다. 그 뒤 1605년 부동(지금의 교동)으로 이전한 뒤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최초의 서원은 연경동의 연경서원으로 1563년(명종 18)에 세워졌다. 그 밖에 1824년(순조 24)에 세워진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다.

근대 교육기관의 시조로는 1899년에 세워진 사립 달성학교가 있으며, 처음에는 대구의 준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으나 뒤에는 일본인 거류민 자녀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최초의 사립초등학교로는 1900년 대구희도심상학교(大邱喜道尋常小學校), 관립으로는 1905년 대구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최초의 중등학교로는 1906년 계성중학교,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229개교, 중학교 125개교, 고등학교 93개교, 전문대학 9개교, 대학교 4개교 등이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공공공연장, 민간공연장, 영화상영관의 공연시설과 화랑의 전시실, 시민회관과 구민회관, 청소년회관 등 지역문화 복지시설이 있으며, 기타시설로 각 구마다 문화원이 있다. 그리고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이 있으며, 국립대구박물관, 경북대학교박물관, 계명대학교박물관, 영남대학교박물관, 대구교육대학교박물관 등이 있다. 1975년에 개관한 종합공연장 대구콘서트하우스(구 대구시민회관)는 공연장 · 전시관뿐만이 아니라, 2013년 리모델링을 통해 국제적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콘서트홀이다. 또한, 지방문화예술 진흥과 향토 문화예술의 발전을 목표로 1990년 개관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대 · 소극장, 13개의 전시장, 국제회의장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대구시립예술단이 상주하고 있다. 특히 칠성2가에 위치하고 있는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단일 공연장으로 국내 최초 오페라전용극장이며,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정 산하기관으로 2003년 개관하였다.

대구의 대표 축제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 치맥페스티벌,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을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하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이밖에도 1978년 고사, 농악놀이 등의 간단한 행사로 시작되었던 약령시축제는 1999년 달구벌축제에서 독립하여 단일축제로 매년 5월 특별한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되어 왔고, 2006년 축제는 전국유일의 한방특구로 지정된 약령시를 대표하기 위한 행사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거리로 인식되는 동성로에서 시민정서 함양 및 문화예술의 대중화를 목표로 열리는 동성로축제, 봉산문화거리를 중심으로 1993년 이후 매년 10월 중순 열리는 봉산미술제 등이 있다.

대구는 2002년 월드컵 본선경기,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2년 제93회 전국체육대회, 2013대구세계에너지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후 2015년 제7차 세계물포럼을 개최한 대구광역시는 물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민속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정월대보름의 지신밟기 · 줄다리기 · 횃불싸움을 들 수 있고, 시절에 관계없이 행해지는 놀이로는 투계(鬪鷄) · 투우를 들 수 있다.

지신밟기는 지신을 위로하는 놀이로 마을 청장년이 모여 사대부 · 팔대부(八大夫) · 포수로 꾸며 행렬에 앞장서게 하고, 농악대 · 주민들이 뒤따르며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을 밟는다. “주인 주인 문여소, 나그네손님 들어가오.”라고 소리치고, 지신밟기패가 문 안으로 들어가 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논다. 이 때 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오고 곡식이나 돈을 주는데 이것은 마을의 여러 가지 공동경비로 사용된다.

줄다리기는 신천에서 자주 열렸는데, 출전한 청장년 외 온 마을사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농악을 울리며 응원한다. 이긴 편 마을에 그 해 풍년이 든다고 믿었고 이긴 편 줄을 썰어 논에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저녁에 횃불싸움을 하는데, 시작 며칠 전부터 홰를 만든다. 대보름달이 뜨면 마주 서 있던 양편은 서로 약을 올리고 농악대는 농악을 울려 자기편의 사기를 돋운다. 한바탕 농악이 끝나면 함성과 함께 동시에 내달아 횃불을 휘두르며 혼전을 벌이는데, 횃불을 빼앗기거나 힘에 부쳐 달아나는 쪽이 지는 것이다.

투계는 길들인 수탉을 싸움시켜 구경거리를 삼는 것이다. 싸움닭은 목이 길고 행동이 민첩해 주둥이로 쪼고 발로 차면서 싸우는데, 주저앉거나 주둥이가 땅에 닿으면 지는 놀이이다.

투우는 소끼리 싸움장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소와 소 사이를 가린 포장을 걷어 올리면 싸움이 시작되는데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는 소가 지는 것으로, 심할 때는 소가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도 있다.

이 지역의 동제는 마을의 수호신인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제를 말한다. 현재는 거의 소멸되고 외곽지대의 일부 자연촌락에서만 볼 수 있다.

산제는 마을 진산(鎭山)에 단을 쌓거나 집을 지어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길일에 지낸다. 제주는 부정이 없어야 하고 목욕재계를 하며 마음가짐도 선량해야 한다. 제주집에는 설날 미리 농기(農旗)를 세워둔다.

제를 지낼 때까지는 모든 주민이 부정을 멀리하고 근신해야 하며, 외부인의 출입과 도살은 금지된다. 제사에 사용될 우물 둘레에는 황토를 깔아 악귀나 마음 더러운 사람의 출입을 막고, 우물은 멍석을 덮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에 쓰는 음식은 제주집에서 장만한다.

제일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주민이 뒤따라 제장으로 가서 자정이 지나 첫닭이 울면 산제를 올린다. 축관(祝官)의 독축(讀祝)이 끝나면 집집마다 호주가 나와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소원을 빈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은 옛날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으므로 이에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효자설화 · 지명유래담 · 자연물관련설화 및 유운룡(柳雲龍) · 이황(李滉) 등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가 널리 전한다.

왕건과 견훤의 싸움은 많은 유적지설화로 남아 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오던 중 동수(桐藪: 지금의 지묘동)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왕건군은 먼 길을 온데다가 견훤군의 동태를 잘 몰랐기 때문에 포위당해 마침내 왕건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복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해 전사한 신숭겸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했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쌓은 표충단(表忠壇)만 남아 있다.

이 싸움으로 그 일대는 왕건에 얽힌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으니, 왕건의 군사가 패하고 군대를 해산했다는 파군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달이 빛나던 반야월, 그 밖에 독좌암 · 해안 · 안심읍 · 살내 · 실왕(지금의 시량) · 장군수 · 은적암 등이 모두 그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다.

이 고장을 다스렸던 달성판관의 명판결 이야기가 있다. 서울의 어느 가난한 선비가 달성판관이 되자 관례에 따라 사또를 모시러 갔던 아전들은 스무 살도 못 되는 단구의 곰보소년이 신임사또인 것을 알고 만만하게 보았다.

일행이 문경지방의 장터에 이르렀을 때, 어린 상주가 장사비용을 마련하려고 닭 다섯 마리를 팔러 나왔다가 닭장수에게 빼앗긴 억울한 사정을 얘기하고 문경 본관사또마저 “네 닭을 어찌 내가 아느냐?”고 꾸짖었을 뿐이었다고 사또에게 호소하였다.

닭장수와 닭을 잡아오게 한 달성판관은 소년과 닭장수에게 “아침에 닭에게 뭘 먹였느냐?”고 물었다. 이어 닭 한 마리를 잡아보니 소년의 말대로 수수쌀이 나와 닭장수에게 닭값을 물게 하고, 문경 본관사또에게 500냥을 빌려 소년의 장사비를 마련해주었다.

부임 후 한참이 지나도 500냥을 갚지 않자 문경사또로부터 독촉이 왔다. 달성판관은 심부름꾼에게 “그 돈은 벌써 갚았다.”며 『대전통편』을 보라고 일러주었다. 거기에는 자기 고을에서 생긴 일을 본관사또가 처리하지 못했을 때 벌금이 500냥이라 되어 있었다.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두르며 어린 사또라고 만만하게 본 것을 뉘우쳤다.

칠성동은 칠성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경상도감사 이태영은 7형제를 두었는데 꿈에 하늘에서 일곱 개의 별이 북문 밖에 떨어져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그 곳에 가보니 일곱 개의 바윗덩이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놓여 있어 석공을 불러 7형제의 이름을 차례로 새겨놓았다. 이상하게도 7형제가 성장함에 따라 이름을 새겨놓은 바위와 비슷해졌다.

험상궂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새긴 세 아들은 훌륭한 무관이 되고, 깨끗하면서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에 이름을 새긴 세 아들은 모두 문관으로 출세하였다. 평범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아들은 벼슬도 못하고 평범하게 평생을 마쳤다 한다. 이 후손이 다시 경상감사가 되어 칠성바위 주변에 의북정을 지었으나 남아 있지 않고 칠성동의 이름에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밖에 산이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는 「날뫼전설」, 자식을 낳게 한다는 「건들바위전설」, 때 아닌 음식을 구해 부모를 봉양한 강순항(姜順恒) · 하광신(夏光臣)의 효행설화, 약전골목에 얽힌 강원도 산삼장수와 욕심 많은 부자 서창규 설화 등 수없이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주민의 이입과 도시 확장에 따라 주변의 민요를 수용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노동현장과 밀착된 근교의 노동요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동북부지역은 상주지방의 가락이나 사설과 비슷하다.

농업노동요 「모찌기소리」 · 「모내기소리」의 사설은 보편적인 [내용]으로 “이물꼬 저물꼬 다 헐어놓고/ 쥔네양반 어데갔소/ 물애야 대잔북 손에 들구우/ 첩의방에 놀로갔네.”나 “모시적삼 안섶안에/ 분통같은 저젖보소/ 아니보면 병날끼고/ 손톱만침 보고가소.” 등과 같이 연정 · 상사를 담기도 하고, 때에 맞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

「논매기소리」는 애벌 · 두벌 · 세벌 논매기노래가 모두 불린다. 나무를 하거나 풀벨 때 부르는 「어사용」도 있는데 “가자가자아 카들갖구우우/ 칠심공산에 풀비러가자 어허……/ 어느시월이 이리가고이가노오/ 갈려구오오 고생많네/ 에에호오야아 가마구야구오……”라고 느리고 구성진 가락으로 부른다.

여성노동요로는 「베틀노래」 · 「진주낭군」 등 시집살이노래가 불리고, “아르랑아르랑 아라리오/ 화래삼고 구래삼고/ 청도밀양 긴삼가래……/ 삼아홉광지리 다삼아도/ 날찾는이 전혀없네……/ 보고지라 우리엄마/ 원통하고 가련하다……”라고 삼을 많이 삼아도 돌보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처녀의 신세한탄을 담은 「삼삼기노래」도 불린다.

일하면서 부르기도 하고 그냥 부르기도 하는 「여치타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소변보다가 놀라서 뛰어가는 여치를 잡아 “풀밭에 널낳아/ 풀천이라고 부르지/ 천아천아 풀천아/ 어히코어하코 웬일로/ 헌출받게도 잘났다/ 허리가 능청한거는 너거아바이를 닮았다……/ 포항고모가 알았이마/ 미역단이나 올낀데……”라고 아들이라 추스리는 노래로, 지역보다는 창자에 따라 불리는 희극적 서사민요이다.

이 밖에도 「노랫가락」 · 「범벅타령」 · 「각설이타령」 등 잡가 · 타령류가 많이 불린다. 「각설이타령」에는 “……육자나한자 들고오마/ 육이오사변에 집태오고/ 거지생활로 들어간다/ 칠자나한자 들고오마/ 칠십리밖에 대포소리/ 인천시내 둘러뺀다……” 등과 같이 1950년을 전후한 세태묘사가 많다.

“수건씨고 벌인돈은/ 중잘모자 다까묵고/ 중잘모자 벌인돈은/ 갓씬높은놈이 다까묵고/ 높은놈이 벌인돈은/ 이기빙이 다까묵고/ 이기빙이 벌인돈은/ 이승마이 다까묵고/ 이승마이 벌인돈은/ 호주각씨 다까묵은다.”라는 노래도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산업 · 교통

대구광역시의 농업은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다. 농업은 달성군에서 주로 행해지나 동구 · 북구 · 달서구 · 수성구에서도 약간 이뤄지고 있다. 경지면적 129.26㎢ 가운데 논 · 밭의 비율은 56: 34로 논농사가 우세하다.

주요 농작물로는 쌀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보리 · 콩 · 감자 · 고구마 등의 작물도 다소 생산된다. 채소류는 배추 · 무 · 양파 · 토마토 · 파 · 수박 · 오이 · 마늘 · 시금치 · 참외 · 고추 등의 순으로 많이 재배되며, 특용작물로는 참깨의 생산이 많다. 과실류는 포도 · 복숭아 · 감 · 자두 · 사과 · 배 등의 순으로 생산되고 있다. 축산업은 근교농업의 일환으로 비교적 성한 편인데, 돼지 · 소(한우 · 젖소) · 닭 · 염소 등이 주로 사육되고 있다.

대구 지역의 광업은 10개 사업체, 43명 종사자로 그 비중이 미약하나, 제조업은 2만 6036개 사업체에 17만 5869명이 종사하고 있다. 제조업체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며, 주로 섬유산업과 기계 · 금속 · 자동차부품 산업 관련 업체들이다.

산업기반시설은 염색 · 검단 · 달성1차 · 달성2차 · 성서 · 출판 · 3공단 · 서대구 · 대구국가 9개의 산업단지, 옥포 · 구지 2개의 논공단지 그리고 이시아폴리스, 테크노폴리스가 있다. 주요산업은 제조업으로 산업단지 내에 9,371개 업체가 있다. 대구지역의 제조업은 이들 산업단지를 기반으로 북구 · 달서구 · 서구 · 달성군 등에 거의 대부분(약89%)이 입지해 지역적으로 편중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역에 비해 중구 · 동구 · 남구 · 수성구 등은 상업 및 주거지역이어서 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남구에는 60개 사업체가 입지해 가장 취약하다.

대구 지역의 상업은 대구가 조선시대 중엽부터 전국적인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발달해온 탓에 오늘날에도 중심적인 산업이 되고 있다. 2015년 기준 도소매업은 4만 9,225개 사업체에 13만 326명이 종사하고 있다. 대구의 도매업은 해방 이후 섬유산업의 발달과 대구약령시(大邱藥令市)의 옛 명성 등을 이어받아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섬유 · 의류도매업과 약령시의 한약도매업 등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전국도매업 매출액의 18.2%를 차지할 만큼 서울 다음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당시 섬유 · 의류도매업은 업체 수에서 전국의 33.7%, 판매액에서 52.6%를 점유해 전국의 1위였다. 이러한 도매업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1971년 이후 도매상권이 서울로 집중됨에 따라 한동안 크게 쇠퇴하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발전하고 있으나 예전의 지위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2020년 기준 대구광역시의 유통업체는 총 204개로, 대형마트 21개소, 전문점 3개소, 백화점 9개소, 쇼핑센터 7개소, 시장 150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가 14개소이다. 상설시장은 과거에 인구 증가와 소득 향상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1980년대부터 현대적인 다른 유통기관의 출현과 발달로 쇠퇴하고 있다. 대표적인 상설시장으로는 과거 한때 전국의 3대 시장에 속했던 서문시장과 청과물(특히 사과)시장으로 유명했던 칠성시장이 있다. 이들 시장도 최근의 쇠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주차장을 건립하는 등 상권 회복에 노력하고 있다.

백화점은 1970년대부터 다수의 현대식 백화점이 설립되어 경쟁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는데,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이 백화점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대형점은 1988년부터 개설되었고, 쇼핑센터는 1984년에 동아쇼핑이 설립되었으며, 슈퍼마켓은 1972년부터 연쇄점 형태로 개점이 확대되어왔으며, 편의점은 1992년 미국 회사와 기술제휴한 로손의 출점을 시작으로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정기시장(5일장)은 가장 오래된 소매기관으로서 1960년대 말까지는 발달해왔으나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해 공설(公設)시장으로는 북구 칠곡에 1개소와 달성군의 6개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1997년 새로운 소매기관으로서 클럽델타를 필두로 대형할인점이 개점하여 기존의 유통시장 질서를 크게 바꿔놓고 있다.

서비스산업도 상업 못지않게 발달해 있다. 서비스업은 2015년 기준으로 17만 9904개 사업체에 73만 1012명이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업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문은 소비성 서비스업인 숙박 및 음식업으로서 3만 1506개 사업체에 8만 2268명이 종사해 전체 서비스업의 약 30% 내외를 점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교육서비스업(10,150개 업체에 6만 7009명이 종사)이 발달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교육도시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금융 및 보험업, 보건 및 사회복지업, 오락 · 문화 및 운동 관련사업, 공공 · 사회 및 개인서비스업, 사업관련서비스업, 부동산 및 임대업 등의 부문에도 많이 종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음식점업은 신흥시가지로 개발된 달서구와 수성구 및 도심지인 중구에 특히 발달해 있다. 교육서비스업은 각 학교가 많이 입지하고 있는 남구와 신흥개발지역인 수성구 · 달서구 · 북구지역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금융 및 보험업은 중구에 가장 발달되어 있고, 수성구와 달서구에도 발달해 있다.

교통은 철도와 도로교통이 매우 발달해 있다. 시내교통은 4개 순환선과 8개 방사선 도로를 축으로 거미줄처럼 가로망이 개설되어 있다.

철도는 경부선이 시가지의 중심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대구∼영천간 대구선이 형성되어 있어 중앙선(청량리∼영천∼경주)과 동해남부선(포항∼경주∼부산)과도 쉽게 연결된다. 또한 경부고속철도가 2004년 4월 1일 개통되어 고속철도인 KTX가 운행되고 있다. 대구 도시철도는 1호선(안심∼설화명곡)과 2호선(문양∼영남대간)에 이어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

대구는 4개의 고속도로 (경부, 광주대구, 중앙, 중부내륙)가 교차하고 있으며 대구 · 포항간 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육로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경부고속도로는 대전 · 서울 방면에서 경주 · 부산방면으로 연결되고, 광주대구고속도로는 고령과 합천 해인사를 거쳐 남원 · 광주방면으로 연결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구간인 현풍~김천 사이의 구간이 2007년 개통됨으로써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경기도 여주에서 경상남도 창원시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며, 중앙고속도로는 안동 · 춘천 방면으로 연결된다. 이 밖에 많은 국도와 지방도가 대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개통되어 있어 광역 도로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항공교통은 도심에서 10여㎞ 떨어진 곳에 대구공항이 있으며 제주국제공항과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항공노선은 국내선 제주, 인천 2개 노선이 매주 210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웨이하이, 연길, 장가계) 36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42편, 동남아((칼리보, 세부, 타이베이, 방콕, 다낭, 하노이, 냐짱) 168편, 대양주(괌오사카 경유)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관광

대구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동성로(시내일원),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서문시장(야시장), 이월드(83타워)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근대골목(한국관광의 별), 삼성상회 옛터, 약령시, 도동서원, 앞산전망대, 팔공산 갓바위, 비슬산(참꽃군락지), 수성못, 힐크레스트, 스파밸리, 마비정 벽화마을, 디아크 등 다양한 관광명소가 있다.

이중 근대골목은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선교사 주택과 3.1만세운동길, 계선성당 등을 두루 살피며 한국의 근대사를 체험하며 관광할 수 있는 대구만의 특별한 관광지이다. 이월드 83타워는 대구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영남권 대형 테마파크 이월드 내에 있는 83타워 전망대는 밤이 되면 오색찬란한 대구 시내의 야경을 360도로 볼 수 있다. 이밖에 앞산전망대에서는 대구 시내의 전경과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앞산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면 S자로 굽어 흐르는 낙동강과 도시 전체를 감싸는 겹겹의 산자락까지 감상할 수 있다.

팔공산과 비슬산은 대구의 대표적인 자연 관광지이다. 팔공산에는 해발 820m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있어 팔공산과 대구 시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매년 봄 비슬산에는 30만 평에 걸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연출한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350m 이어진 골목 담벼락에 대한민국의 대표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한 벽화가 실감 나게 펼쳐지는 거리이다. 마비정벽화마을은 토담과 벽면을 가득 채운 정겨운 벽화를 자랑하는 관광지이다. 길을 따라 1960~1970년대 정겨운 농촌 풍경이 벽화로 꾸며져 있다.

동성로는 도심에 형성된 대구 제일의 번화가이자 쇼핑의 거리이다. 동성로에는 교동 귀금속거리, 떡볶이골목, 가방골목, 야시골목, 구제골목 등 각종 골목이 상권을 이루고 있다. 약령시는 조선시대 때 전국 제일의 한약재시장이었던 대구 약령시의 잔영을 간직하고 있는 시장으로 약전골목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구약령시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일대이다.

수성못은 둘레 2km 규모의 호수로, 바늘꽃, 연꽃, 갈대 등이 어우러진 수변 데크로드와 울창한 왕벚나무, 버드나무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다. 밤에는 물 위에 비친 조명과 대구시의 야경이 더해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스파밸리는 주암산 기슭 청정자연에서 물놀이와 온천, 숲속 호텔 등을 즐길 수 있는 복합테마파크이다. 한방 온천탕, 파도풀, 바데풀 등이 있어 맑은 공기와 다양한 놀 거리를 즐길 수 있다.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가 있다. 대구 속 시간여행코스는 대구의 과거와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코스로 주요 관광지인 이월드/83타워와 동성로 그리고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경유하는 코스이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는 대구 수성과 가창의 명소를 둘러보는 코스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앞산 전망대 그리고 수성못 등이 있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는 대구시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코스로 강정고령보(디아크)와 마비정벽화마을 그리고 비슬산암괴류를 경유한다. 마지막 팔공산 힐링 코스는 대구의 명산 팔공산을 테마로한 관광코스로서 갓바위와 팔공산 벚꽃길을 지나는 팔공산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관광테마코스다.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아름다운 풍경 ‘대구12경’은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83타워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다.

대구만의 특별한 먹거리를 일반적으로 대구10미(味)라 한다. 대구10미는 대구육개장, 막창구이, 뭉티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메운탕, 복어불고기, 누른 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로 구성되어 있다.

구(區)

남구(南區)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17.43㎢, 인구는 14만 9660명(2020년 기준). 구청 소재지는 봉덕동이다. 지형은 북 · 남이 평야와 산지로 양분되어 있다. 북부의 평야는 서쪽의 신천(新川) 연변지역(봉덕동, 이천동)에는 충적평야에 속하는 범람원, 동쪽지역(대명동)에는 침식평야에 해당하는 준평원, 그리고 평야 남단부의 고산골 · 큰골 · 안지랭이골 등의 산지 입구에는 충적평야의 일종인 선상지 등으로 각각 달리 형성되어 있다.

남부의 산지는 대구광역시의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비슬산괴(琵瑟山塊)에 속하는 이른바 앞산괴의 산지로서 앞산(660m)을 중심으로 서쪽의 대덕산(大德山, 584m)과 동쪽의 산성산(山城山, 653m)으로 연결 · 형성되어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관내 수성현(壽城縣)의 하수서면(下守西面)에 속했으나, 그 뒤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대구군(大邱郡)의 하수서면이 되었다가 1910년에는 대구부(大邱府)상수서면(上守西面)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의 관할구역이 대구면(오늘날의 중구)으로 크게 축소됨에 따라 이 지역은 신설된 달성군(達城郡)의 수성면(壽城面)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대구부역의 확장에 따라 이 지역이 속한 수성면이 다시 대구로 편입되고 새로 설치된 동부출장소의 관할 하에 놓였다.

1949년에는 대구부가 대구시(大邱市)로 개칭되었고, 1951년에는 이 지역의 21개 동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에는 구제(區制) 실시로 남부출장소 일원에 남구가 설치되었다.

1970년 이후행정동을 신설하고 일련의 분동(分洞)과 조정을 거쳐왔는데, 1980년에는 남산동 전부, 대봉1동과 대봉3동 일부, 대명4 · 6동 등이 중구로 편입되고, 대봉3동 일부가 이천1동으로, 대봉2동이 이천2동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 남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달성군의 월배읍을 편입하고 월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8년에는 월배출장소 관할의 월배1 · 2 · 3동과 송현1 · 2동을 신설된 달서구로 편입시키고 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95년에는 대구광역시 남구가 되었다.

남구의 토지 지목별 현황을 보면 대지가 35.2%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임야 24.1%, 공원 15.3%, 도로 12.4%, 학교용지 4.8%, 잡종지 3.7% 순이며, 기타 4.5%이다.(2015년)

2016년 기준 남구의 총 사업체 수는 1만 4293개이고, 종사자수는 5만 2841명이다. 1차 산업인 농업, 임업 및 어업은 2016년 1개 업체 22명의 종사자가 있으며, 제조업은 사업체수가 818개에, 종사자수가 1,902명이고, 전기 · 가스 및 수도사업의 사업체수는 8개, 종사자수 184명이다. 건설업 사업체수는 627개, 종사자수는 2,928명이고, 도매 및 소매업 사업체수는 3,828개, 종사자수는 7,995명으로 도매 및 소매업이 남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남구에 입지하고 있는 재래시장은 17곳이며, 대형할인점이 1곳이다. 또한 숙박 및 음식점업은 사업체수 2,653개, 종사자수 6,103명이고, 운수업 사업체수는 1,286개, 종사자수는 2,225명이다. 금융 및 보험업의 사업체수는 126개, 종사자수는 1,162명이고, 부동산, 임대 및 사업서비스업 사업체수는 401개, 종사자수는 1,394명이다. 공공행정 및 사회보장행정 사업체수는 33개, 종사자수는 1,591명이고, 교육 서비스업 사업체수는 623개, 종사자수는 5,430명이다.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사업체수는 475개, 종사자수는 8,478명이고, 예술 스포츠 및 여가관련 서비스업 사업체수는 465개, 종사자수는 1,006명이다. 마지막으로 협회 및 단체, 수리 및 기타개인 서비스업 사업체수는 2,045개, 종사자수는 3,664명이다. 이와 같이 남구지역은 주거 및 상업지역으로 상업 및 서비스업이 중심적인 산업이다.

교통은 지하철 1호선 및 3호선이 통과하고, 남북을 잇는 신천대로와 동서를 잇는 앞산순환도로를 비롯한 많은 시내 간선도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탁영종택문적(濯纓宗宅文籍) 등이 소장되어 있다. 봉덕동에는 법장사삼층석탑, 대명동에는 대덕산성(大德山城)이 있으며, 봉덕동에 봉덕토성(일명 용두산토성)이 있다. 관광지로는 앞산공원이 유명하다. 이천동, 봉덕동, 대명동 3개의 행정동이 있다.

달서구(達西區)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62.34㎢, 인구는 총 57만 9352명(2020년 기준)이다. 구청 소재지는 월성동이다. 지형은 대부분이 평야이다. 북부의 달성군 다사면과의 경계지대에는 와룡산(300m)과 궁산(253m)이 있고, 동남부에는 비슬산괴에 속하는 앞산(660m) · 대덕산(584m) · 청룡산(794m) · 삼필봉(468m)등으로 이어진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 나머지 지역은 낙동강의 지류인 진천천(辰泉川)과 금호강(琴湖江) 하류의 주변에 형성된 넓은 충적평야(범람원)와 두류산(131m)공원 일대에 형성된 준평원상(準平原狀)의 침식평야로 되어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 관내 대구본부(大邱本府)의 달서면(達西面) · 성서면(城西面)과 화원현(花園縣)의 감물천면(甘勿川面) · 조암면(租巖面) · 월배면(月背面) 등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그 뒤 이들 면지역은 행정구역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대구군(1896)과 대구부(1910) 관할 하에 그대로 속했으나, 1914년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이들 5개 면이 달서면 · 성서면 · 월배면으로 통폐합되어 신설된 달성군에 편입되었다.

1938년의 대구부의 구역 확장으로 달성군 달서면의 10개 동이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1957년에는 달성군의 성서면과 월배면이 대구시에 편입되었으나 1963년에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1981년 7월에 대구직할시 승격에 따른 구역 확장으로 월배읍과 성서읍이 각각 남구와 서구로 편입되었다. 1988년 남구와 서구의 일부 구역을 병합해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에는 대구광역시 달서구가 되었으며 달성군 화원읍 관내 구라리의 일부를 편입하고, 1998년에는 월성동 일부가 상인동으로 경계조정이 되었다. 이후 2003년에 장기동이 장기동 · 용산1동 · 용산2동으로 분리되었고, 이곡동이 이곡1동 · 이곡2동으로 분리되어 행정동이 21개에서 24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대곡동 일부가 달성군으로 경계가 조정되었다. 2005년 4월에는 파산동이 호산동으로 법정동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목별 토지이용을 보면, 임야가 전체의 31.6%, 대지 20.8%, 공장용지 12.2%, 도로 12.1%, 경지 7.2%, 학교용지 4.2%, 하천 3.4%, 공원 3.2%, 기타 5.3%를 나타내고 있다.(2015년)

대구시에 편입된 지 오래 되지 않은 외곽지역이어서 아직도 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농업지역은 진천동, 도원동, 월성1 · 2동, 장기동이며, 쌀 · 보리 · 채소류의 재배와 소 · 돼지 · 개 · 닭 등의 가축사육이 중심인 도시근교농업의 특성이 강하다.

달서구의 총 산업체는 4만 424개이고 총 종사자는 20만 2617명이다. 업체 수에 있어서는 도매 및 소매업이 총 8,586개 업체로 전체의 22.2%를 차지하여 비율이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부동산 · 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운수 및 통신업, 제조업, 그리고 기타 산업의 순이다. 그러나 종업원 수에 있어서는 제조업 종사자가 총 6만 2611명으로 그 비중이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기타 산업, 도매 및 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운수 및 통신업, 부동산 · 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의 순이다.

2016년 기준 달서구의 총 산업체는 4만 2089개이고 총 종사자는 20만 7628명이다. 업체 수에 있어서는 도매 및 소매업이 총 9,133개 업체로 전체의 21.6%를 차지하여 비율이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부동산 · 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운수 및 통신업, 제조업, 그리고 기타 산업의 순이다. 그러나 종업원 수에 있어서는 제조업 종사자가 총 5만 9613명으로 그 비중이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기타 산업, 도매 및 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운수 및 통신업, 부동산 · 임대업 및 사업 서비스업의 순이다.

달서구의 제조업은 업체수의 비중은 낮지만 종사자 5만 9613명으로 전체 종사자의 약 29%를 차지하여 지역산업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사자수에 있어서는 대구광역시의 전체 시 · 군중에서 그 비중이 가장 크다. 따라서 북구와 더불어 대구공업의 핵심지역이 되고 있다. 성서산업단지는 대구의 공업단지 중에서 가장 늦은 1984년 1차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1993년 2차단지, 2001년 3차단지, 2006년 4차단지, 2007년 5차단지에 이르기까지 갈산동 외 10개 동에 걸쳐 총 4개의 대규모단지로 조성된 우리나라 동남권 최대 지방산업 단지이다. 현재 기계 금속, 자동차부품, 섬유, 화학, 전기, 전자, 목재, 종이, 안경, 음식료 등 총 2,753개 업체에서 5만 7,640명의 근로자가 연간 7조 5천억 원의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 13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교통은 관내를 구마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경부 · 중앙 · 88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앞으로 낙동강변도로도 건설될 예정이다. 또한 국도 5호선 및 지하철 1호선 및 2호선이 통과하고, 대구광역시의 동서 간 간선도로인대서로와 앞산순환도로를 비롯한 간선도로가 발달한 교통요지로 변모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상인동에 월곡 우배선 임진왜란창의유록 및 관련문서와 신당동에 돌장승, 상인동 · 월성동 · 진천동 일대 지석묘 등과 그 외에 많은 유물 · 유적들이 있다. 관광지로는 두류공원과 이월드, 문화예술회관, 대구수목원 등이 있다.

성당(聖堂) · 두류(頭流) · 장(壯) · 장기(長基) · 용산(龍山) · 감삼(甘三) · 죽전(竹田) · 이곡(梨谷) · 파산(巴山) · 호림(狐林) · 파호(巴湖) · 갈산(葛山) · 신당(新塘) · 본리(本里) · 월성(月城) · 대천(大泉) · 월암(月巖) · 상인(上仁) · 도원(桃源) · 진천(辰泉) · 대곡(大谷) · 유천(流川) · 송현(松峴) · 본(本) 등 24개 동이 있다.

동구(東區)

대구광역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 182.16㎢, 인구 34만 7376명(2020년 기준). 구청 소재지는 신암동이다. 지형은 남부 및 남서부에 평야가 좁게 발달해 있고, 그 나머지 지역은 산지이다. 평야는 동구의 남부를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을 경계로, 동변지역(안심 · 동촌 · 불로지역)에는 범람원 충적평야가, 서변지역(신암동 · 신천동 · 효목동)에는 준평원상의 침식저지가 형성되어 있다.

동구의 대부분은 안심(安心) 동북쪽의 초례봉(636m)에서 북쪽으로 환성산(808m) · 능성고개(310m) · 관봉(852m) · 노족봉(887m) · 동봉(1,156m)에 이른다. 여기서 서쪽으로 팔공산 주봉(1,193m) · 서봉 · 파계봉(991m) · 파계재(900m)에 연결되는 팔공산괴(八公山塊)와 그 전면(前面)에 팔공산괴를 둘러싼 이른바 환상(環狀)산맥에 속하는 능천산(476m) · 용암산(382m) · 문암산(431m) · 응봉(507m) · 응해산(516m) 등으로 연결된 산지로 이뤄져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관할 하의 해안현(解顔縣) 전역과 수성현(壽城縣)의 일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그 뒤 대구군(1896년) 및 대구부(1910년) 관할 하에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지역은 신설된 달성군의 수성면과 공산면 및 해안면에 분할 · 이속되었다. 1938년에 대구부역의 확장으로 수성면이 다시 대구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구부를 대구시(市)로 개칭하였다. 1958년에 달성군의 공산면과 동촌면(舊 해안면)이 시역 확장으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구제(區制) 실시로 동부출장소 지역은 동구로 승격되고, 동촌면에는 동구 동촌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공산면은 다시 달성군으로 환원되었다.

1980년에는 동구를 동구(신천동 · 신암동 · 효목동)와 수성구로 분구하면서 동촌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달성군의 공산면과 경산군의 안심읍 전역을 편입하였다. 1995년에는 대구광역시 동구로 되었다.

2015년 현재 동구의 면적은 182.17㎢로 대구광역시 전체면적 883.48㎢의 20.6%를 차지하여 달성군(426.67㎢) 다음으로 넓다. 지목별 토지이용 현황은 임야가 110.55㎢로 전체면적의 60.7%를 차지하며, 논 13.61㎢, 밭 9.15㎢, 대지 14.32㎢, 하천 6.96㎢, 도로 9.66㎢, 기타 17.92㎢로 나타난다.

산업은 상업 및 서비스업이 중심산업이지만 농업과 공업도 상당히 행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 쌀 · 보리 · 과실(사과 · 포도), 각종 채소류 등을 주로 생산하고, 각종 가축의 사육도 행해지고 있다. 농 · 축산업은 안심동 · 공산동 · 둔산동 · 부동 · 불로동 · 봉무동 · 평광동 · 도동 등지에서 많이 한다.

산업구조를 보면, 3차 산업 종사자가 전체 사업체 종사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3차 산업 중에서도 도매 및 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 등 소비자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매우 크다. 제조업은 미등록 업체를 제외한 제조업체 중에서 기계 및 섬유업체가 대부분이고, 그 규모도 50명 미만의 영세업자가 약 98%를 차지하고 있다.

교통은 각종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대구공항과 동대구역 및 고속버스터미널이 입지해 있고, 경부선과 대구선 철도가 통과하며, 경부고속도로의 동대구인터체인지와 대구∼포항간 4차선 산업국도의 기점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이 위치하고, 시내도로는 주요 간선도로와 잘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도학동의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을 비롯한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중요민속문화재 등의 국가문화재 22점이 있으며, 시지정문화재 37개, 등록문화재 5개로 대구광역시 전체 문화재의 36.4%를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비지정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팔공산자연공원(갓바위 · 동화사 · 파계사 등의 국민관광지) · 동촌유원지 · 망우공원 등이 있다.

신천(新川) · 신암(新巖) · 효목(孝睦) · 평광(坪廣) · 도(道) · 검사(檢沙) · 봉무(鳳舞) · 불로(不老) · 지저(枝底) · 입석(立石) · 방촌(芳村) · 둔산(屯山) · 부(釜) · 신평(新坪) · 율하(栗下) · 신기(新基) · 용계(龍溪) · 율암(栗巖) · 상매(上梅) · 매여(梅餘) · 동내(東內) · 괴전(槐田) · 금강(琴江) · 대림(大林) · 사복(司福) · 숙천(淑泉) · 내곡(內谷) · 동호(東湖) · 서호(西湖) · 각산(角山) · 능성(能城) · 진인(眞仁) · 도학(道鶴) · 백안(百安) · 미곡(米谷) · 용수(龍水) · 신무(新武) · 미대(美垈) · 내(內) · 지묘(智妙) · 신서(新西) · 덕곡(德谷) · 송정(松亭) · 신룡(新龍) · 중대(中大) 등 45개 법정동이 있다.

북구(北區)

대구광역시의 북쪽에 위치한 구. 면적 93.98㎢, 인구 44만 334명(2020년 기준). 구청 소재지는 침산동이다.

지형은 평야와 산지로 되어 있다. 북구의 남부를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과 동화천의 하류 및 팔거천 유역에는 범람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동남부의 산격동 · 복현동 · 대현동 일대에는 준평원상의 침식평원이 형성돼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팔거천의 동 · 서부는 산지를 이룬다. 동부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덕산(660m) · 응해산(516m) · 함지산(288m) 등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서부에는 북쪽의 명봉산(402m)을 제외하고는 200∼300m의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의 일부(오늘날 칠성동 · 침산동 · 산격동 · 복현동 · 검단동)는 조선 후기에 대구도호부 관할 하의 대구본부(大邱本府) 내 동상면(東上面)과 동중면(東中面)에 속했다.

이들 지역은 그 뒤 대구군(1896년)과 대구부(1910년) 관할 하에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칠성동)와 신설된 달성군의 성북면(城北面: 침산동 · 산격동 · 복현동 · 검단동)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1938년대구부역의 확장으로 성북면 4개 동이 다시 대구에 편입되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에는 구제(區制) 실시로 북부출장소와 공산면의 동변 · 서변동을 편입해 북구로 승격되었다.

1964년에 관내 태평로3가가 중구로 편입되었고, 1966년과 1968년에 각각 침산동 일부와 칠성2가동 일부가 서구와 동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에는 칠성2가동 일부와 대현동 일부가 각각 중구와 동구로 편입되었고, 중구의 동인동1가 · 동인동3가 일부와 동구의 신암동 일부 및 서구의 원대2가 일부, 원대4 · 5 · 6가 · 노곡동 · 조야동을 편입하였다.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과 함께 칠곡군의 칠곡읍을 편입하고 북구 칠곡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7년에 동구의 연경동과 신암동 일부를 편입했으며, 1995년에 대구광역시 북구로 변경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칠곡1동이 칠곡1동과 태전동으로 분동되었다. 1996년 구암동 일부가 태전동으로 조정하였으며, 1997년 칠곡출장소가 강북출장소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7년칠성동2가 일부가 칠성동1가로, 복현동, 검단동 일부가 산격동으로, 동천동 일부가 읍내동으로, 관음동 일부가 태전동으로 조정하였다.

1998년 10월 강북출장소 폐지되었고, 칠성1가동과 칠성2가1동이 칠성1동으로, 노원3가1동과 조원3가2동을 노원3동으로, 대현2동과 대현3동이 대현2동으로, 무태동과 조야동이 무태조야동으로, 노곡동과 칠곡2동이 칠곡2동으로 통폐합이 이루어졌으며, 칠성2가2동이 칠성2동으로, 노원1.2가동이 노원1.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9년 5월에는 칠성1동과 칠성2동이 칠성동으로 행정동 통폐합이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6월 법정동간 경계가 일부 조정되었다. 2003년 3월칠곡1동이 태전2동과 구암동, 칠곡3동이 읍내동, 동천동으로 분동되었으며, 태전동이 태전1동으로 칠곡2동이 관문동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9년과 2011년에 각각 노원1 · 2동과 노원3동을 노원동으로 통합하였고, 동천동은 동천동과 국우동으로 분동하였다. 또한 대현 1 · 2동이 대현동으로 통합되었다.

토지이용은 총면적 95.53㎢ 중에 임야가 46.83㎢로 49.0%, 대지가 12.67㎢로 13.3%, 경지가 10.77㎢로 11.2%, 도로 7.64㎢로 8.0%, 하천 6.2㎢로 6.5%, 공장지 2.86㎢로 3.0%, 학교 1.83㎢로 1.9%, 기타 6.73㎢로 7.1%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은 5.21㎢이며, 밭은 5.56㎢ 이다.

산업은 공업과 상업 및 서비스업이 중심산업이나, 농업도 다소 행해지고 있다. 북구의 농촌지역은 점차 도시화에 밀려 일부지역이 택지화되면서 경지면적은 크게 줄어 약 574㏊이고, 거의 대부분의 잔여농지는 개발제한구역 내에 분포하고 있다.

공업중 제조업체수는 대구에서 가장 많은 8,450개 업체인데 비하여 종사자는 3만 5831명(2016년)에 지나지 않아 전체 업체의 60%(6341개 업체) 이상이 종사자수 5인 이하의 소규모 업체이다. 기계 · 금속업이 총사업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주종이 되고 있다. 대구 제3공업단지와 검단공업단지가 각각 위치하고 있는 노원동과 검단동에 공장이 집중 · 입지해 있다.

상업과 서비스업도 중요한 산업이 되고 있다. 상업(도 · 소매업)은 큰 시장이 분포하거나 거주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칠성1가동 · 고성동 · 노원2 · 3가동 · 산격3동 · 복현1 · 2동 · 칠곡1 · 3동 · 관음동 등에서 더 발달해 있다.

또한 산격동 일원에 조성된 대구종합유통단지는 83만 7,721㎡의 면적에 전시컨벤션센터(EXCO), 패션 · 디자인개발지원센터, 도매단지, 기업관, 물류단지, 각종지원시설 등이 입지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대구지역의 상업유통의 거점이다.

북구는 신천대로, 신천동로, 4차순환선이 연결되는 편리한 시내교통망을 갖추고 있으며, 광역교통망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88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금호J.C와 칠곡I.C 및 북대구I.C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외 경부선 철도와 대구~안동간 국도가 통과하는 대구지역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의 최대 교통요충지이다.

문화유적은 산격동의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석조부도(石造浮屠)를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있고, 읍내동에 칠곡향교 대성전이 있다.

읍내, 관음, 동호, 학정, 동천, 도남, 국우, 구암, 연경, 동변, 서변, 조야, 노곡, 태전, 매천, 금호, 팔달, 사수, 침산, 검단, 산격, 복현, 대현, 노원1~3가, 고성1~3가, 칠성1~2가 등 31개 법정동이 있다.

서구(西區)

대구광역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구, 면적 17.33㎢, 인구 17만 7758명(2020년 기준). 구청 소재지는 평리동이다.

지형은 거의 대부분이 평야이다. 북부에는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달서천(達西川) 주변에 충적평야 범람원이 발달해 있고, 남부에는 침식에 의한 준평원상의 침식저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지는 서쪽에 달성군 다사읍과의 경계에 솟은 와룡산(300m)이 전부이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 대구도호부 관할 하의 대구본부(大邱本府) 내 서중면(西中面)과 달서면(達西面)에 속했다. 그 뒤 대구군(1896년)과 대구부(1910년) 관할 하의 면으로 그대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달성군의 달서면(達西面)에 속하게 되었다.

1938년 대구부역의 확장으로 달서면이 대구로 다시 편입되고 그 곳에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9년에 대구시(市) 서부출장소가 되었다. 1963년에 구제(區制) 실시로 서구로 승격되었다. 1975년에 서구의 일부(원대동4 · 5 · 6가 · 노곡동 · 조야동)가 북구로 편입되었다.

1981년대구직할시 승격 때 달성군의 성서읍(城西邑)을 편입해 서구 성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3년에는 성서출장소를 성서1 · 2 · 3동으로 변경하였다. 1988년에는 서구의 일부 구역(성당동 · 성서동 · 본리동 · 내당동 일부)이 신설된 달서구로 편입되었다. 1995년대구광역시 서구로 되었다.

서구의 토지이용 현황을 보면, 총 면적 중에서 주거지역이 가장 넓고 녹지지역, 공업지역, 상업지역의 순이다. 그리고 지목별 현황은 도시지역 특성상 대지와 공장의 구성비가 높고 전답을 포함한 경지의 구성비는 상대적 낮다.

농업은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상리동에서만 약간 행해지고 있으나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2016년 기준 서구 지역의 총 사업체는 1만 9390개로 종사자는 7만 8708명이다. 산업대분류별 사업체수 및 종사자수의 구성에 있어서는, 제조업이 3,193업체에 2만 1,138명, 도매 및 소매업이 5,775개 업체에 1만 4998명, 숙박 및 음식점업이 3,093개 업체에 6,578명, 운수업이 1,837개 업체에 5,022, 기타 공공 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이 2,298개 업체에 5,175명 등으로 나타나서 업체수로는 도매 및 소매업(29.7%)이 가장 많고 종사자 수로는 제조업(26.8%)이 가장 많다. 그리고 2015년 제조업의 업종별 현황을 보면, 섬유가 529개 업체(44.3%)에 종사자 수 1만 2865명(61.9%)으로 가장 많고 의복 및 모피가 177개 업체에 종사자 수 2,031명, 조립금속제품이 138개 업체에 1,435명, 기타 기계 및 장비가 99개 업체에 1,193명 등으로 나타난다.

서구는 일찍부터 서대구공단과 비산염색공단 등이 조성됨에 따라 대구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왔고 현재에도 대도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이 가장 높다. 공장은 서대구공단(상리동과 중리동에 소재)과 대구염색공단(비산7동)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상업과 각종 서비스업도 중요한 산업이 되고 있는데, 평리3 · 4동 · 비산7동 · 내당1 · 4동 등이 중심지역이다. 서비스업 가운데 음식 · 숙박업이 가장 발달해 있다.

교통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지만 관내에는 역은 없다. 그러나 상리동에 서대구인터체인지가 설치되어 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및 중앙고속도로 등 4개의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광역교통망 체계는 양호한 편이다. 또한 대구광역시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고 시내버스 노선망도 발달하여 대중교통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문화유적은 비산동에 천왕매기와 날뫼북춤이 전한다. 2015년 현재 서구에는 17개의 유치원을 비롯하여 17개의 초등학교와 9개의 중학교 및 5개의 고등학교 등 총 50개 교육기관이 있다.

평리(坪里) · 내당(內唐) · 비산(飛山) · 상리(上里) · 중리(中里) · 이현(梨峴) · 원대1가(院垈一街) · 원대2가 · 원대3가 등 9개 법정동이 있다.

수성구(壽城區)

대구광역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 76.53㎢, 인구 43만 334명(2020년 기준). 구청 소재지는 범어동이다.

지형은 평야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평야는 여러 곳에 분산적으로 발달해 있다. 북쪽 경계지대를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 연변에는 충적평야(범람원)가 좁게 형성되어 있고, 서북부의 만촌동 · 범어동 일대에는 침식평야(준평원)가 좁게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부의 신천과 범어천 주변에는 수성벌이라고 불리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했으며, 동부의 고산 일대에는 충적평야(선상지)가 형성되어 있다.

산지는 중앙부에 두리봉(215m) · 모봉(151m) · 형제봉(195m) 등의 구릉성 산지가 있고, 남부에는 법니산(法泥山, 348m) · 용지봉(龍池峯, 628m) · 대덕산(大德山, 600m) 등으로 연결되는 비교적 높은 산지가 넓게 분포한다.

본래 이 지역의 일부는 조선 후기에 대구도호부 관할 하의 수성현(壽城縣) 내 수현내면(守縣內面) · 수북면(守北面) · 수동면(守東面)에 속했다. 그 뒤 대구군(1896)과 대구부(1910) 관할 하의 같은 면(面)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달성군의 수성면에 속하게 되었다.

1938년 대구부역의 확장으로 수성면이 다시 대구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가 되었다. 1963년에 동부출장소 관할지역은 동구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는 동구의 일부(범어동 · 만촌동 · 수성동1∼4가 · 황금동 · 중동 · 상동 · 파동 · 두산동 · 지산동 · 범물동)가 분리되어 수성구가 되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 때 경산군 고산면이 편입되어 고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3년에 고산출장소가 폐지되면서 고산1 · 2동이 설치되었다. 1995년대구광역시 수성구로 변경되었다. 이 지역은 대구의 중산층 주거(아파트)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1월범물동이 범물1 · 2동, 고산1동이 고산1 · 3동으로 분동하였다. 그리고 2001년 12월 31일고산2동의 법정동 중 내환동을 대흥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녹지와 생활편이시설이 잘 갖추어진 대구 제일의 쾌적한 주거지역이다. 따라서 지산 · 범물지구와 시지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인구유입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2015년 현재 수성구의 주택 현황을 보면, 아파트 8만 4206호(55.7%), 단독주택 2만 3891호(23.9%), 다세대주택 6,163호(16%), 연립주택 2,233호(1.2%), 비 거주용 건물 2,207호(3.2%)로 아파트의 비중이 가장 높은 대표적인 신흥주택지역이다.

수성구의 지목별 토지이용 현황은 임야 5.1%, 대지 16.9%, 경지 12%, 도로가 7.7%이며 그 외 기타로 12.5%이다. 경지 면적 중에는 논이 51.3%이고 밭은 48.7%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면적 중에서 시가지 면적은 23.4%를 차지하고, 나머지 76.6%는 아직 비시가지 지역으로 그 면적이다.

산업은 상업 및 서비스업이 중심이다. 수성구의 산업을 산업대분류별로 살펴보면, 2015년 현재 농업 및 임업이 4개 업체에 종사자 18명이며, 제조업은 884개 업체에 종사자 수는 2,941명이다. 전기, 가스 및 수도사업은 7개 업체에 종사자는 391명이고, 건설업은 1,016개 업체에 1만 1508명이다. 도, 소매업은 5,381개 업체에 1만 5546명이고, 숙박 및 음식점업은 4,570개 업체에 1만 4997명으로 수성구에서는 도, 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이 업체수와 종사자수 측면에서 모두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상업(소매업)은 대형할인점, 시장 그리고 백화점 및 가로상가를 중심으로 분산되어 비교적 발달해 있다. 서비스업은 이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중추산업이다. 서비스업 가운데 음식 · 숙박업, 교육서비스업, 금융 · 보험업, 법률서비스업 등이 특히 발달했다.

금융 · 보험업은 중구 다음으로 발달했으며, 교육 및 법률서비스업은 대구에서 가장 발달한 업종이다. 음식점은 들안길 음식점가(일명 먹자골목)가 위치하는 두산동에서, 금융기관은 범어네거리 주변의 범어동과 수성2 · 3가동에서 그리고 법률서비스업은 대구 지방 · 고등법원과 함께 대구의 모든 변호사사무소가 집중해 있는 범어2 · 3동에 발달 · 분포하고 있다.

교통시설에 있어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개설되어 기존 경부고속도로와 연계가 이루어짐으로써 동으로 포항, 남으로는 부산과의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 항만의 접근성이 제고되어 교통요충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대구국제공항과, 동대구역, 고속버스터미널 등과의 접근성도 매우 양호하다. 이러한 외부지역과의 양호한 접근성과 주거환경으로 대구의 새로운 중추관리기능 집적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지하철 2호선(성서∼고산) 개통으로 인해 편리한 대중교통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문화유적은 만촌동의 망우공원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李公堤碑및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등이 있다. 관광지로는 대구국립박물관 · 범어공원(어린이공원) · 수성못 등이 있다.

범어(泛魚)1 · 2 · 3 · 4동, 수성(壽城)1가 · 2가 · 3가 · 4가동, 만촌(晩村)1 · 2 · 3동, 황금(黃金)1 · 2동, 중(中)동, 상(上)동, 파(巴)동, 두산(斗山)동, 지산(池山)1 · 2동, 범물(凡勿)1 · 2동, 고산(孤山)1 · 2 · 3동의 23개 행정동과 26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구(中區)

대구광역시의 중앙에 위치한 구. 면적은 7.06㎢, 인구 7만 8219명(2020년 기준)이다. 구청 소재지는 동인동이다.

분지상의 대구지역의 중심지로서, 팔조령에서 발원하는 신천의 서쪽 범람원과 그 주변에 발달한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그 범람원은 두텁게 퇴적된 사력질 토양의 충적층으로서 두께가 3~5m로 투수성이 강하다. 북동부의 팔공산(1,193m)과 남구의 대덕산(584m)으로 둘러싸이고 서쪽은 개방된 나팔상의 대구분지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 관내 대구본부(大邱本府)와 그 후 경상북도 대구군(1896년) 및 대구부(1910)의 동상면(東上面)과 서상면(西上面)에 각각 속했다. 1911년에는 대구부의 동상면과 서상면이 대구면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의 중구에 해당하는 대구면 구역만이 대구부로 개편되었다. 1949년에는 지방자치법의 실시로 대구부를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1953년에는 이 지역의 동인1가 외 16개 동을 관할하는 중부출장소와 덕산동의 37개 동을 관할하는 종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 구제(區制) 실시로 이 두 출장소가 중구(中區)로 통합 ·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행정동 21개 동(법정동 55개 동)에 면적 4.6㎢, 인구 15만 1071명을 관할하였다. 1964년에는 북구의 태평로3가를 편입했고, 1980년에는 남구의 남산동 · 대봉동 일부 · 대명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 중구로, 1995년에는 대구광역시 중구로 개칭되었다. 1999년에 구청사를 동인2가 78번지(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동인2가 177 · 4번지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토지는 현재 대지(61.3%)로 이용되는 것이 가장 많고, 그 외에는 도로 23.5%, 학교용지 5.0%, 하천 3.8%, 공원 2.0%, 기타 4.4%로 이용되고 있다.

2016년 기준 중구의 사업체는 총 2만 1399개소로 9만 2741명이 종사하고 있다. 산업별로 살펴보면, 도 · 소매업이 9,591개 소(44.8%), 종사자 2만 2902명으로 비중이 가장 높다. 그리고 숙박 및 음식점업이 3,271개 소(15.2%), 종사자 1만 1512명, 제조업이 2,050개 소(9.5%), 종사자 4,831명, 기타공공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이 1,781개 소(8.3%), 종사자 4,234명, 사업서비스업 사업체수 367개 소(1.7%), 종사자 4,851명 순으로 나타난다. 상업에 종사하는 업체가 총 사업체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고, 그 이후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종사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 · 소매업은 서문시장이 소재하는 대신1동과 대구에서 가장 번화가인 반월당 · 동성로 · 중앙로 · 한일로 일대에 집중 발달해 있다. 서비스업에서는 음식점 및 숙박업을 비롯해 공공 · 사회 및 개인서비스업, 부동산 임대 및 사업서비스업, 금융 및 보험업 등이 발달한 업종이다. 특히 대구 지역의 금융중심지로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를 비롯하여 19개 시중은행 지점, 18개 지방은행 지점, 10개 특수은행 그리고 기타 1개 등 총 48개의 은행과 증권 및 각종 보험회사 등의 금융기관이 집중하고 있다.

교통은 북구와의 경계선을 따라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며, 대구광역시 지하철의 1호선과 2호선이 모두 통과하며, 봉산동에는 대구시의 유일한 1 · 2호선 환승역(반월당역)이 있고 남산동에는 1 · 3호선 환승역(명덕역)이 있다. 또한, 시내버스 노선의 결절지로 대중교통의 요지이다.

문화유적은 계산동에 계산성당을 비롯하여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 내에 선화당 · 징청각, 대봉동에 건들바위, 달성공원 내에 관풍루(觀風樓) 등과, 남산동에 대구향교 대성전를 포함해 대구시 근대 교육 유적지들이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달성공원 · 경상감영공원 · 서문시장 · 동성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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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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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의 대구』(대구직할시,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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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북민요』(조동일, 형설출판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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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구의 공업』(홍경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연구실, 1969)
  • ・ 『대구시도시지리학적연구』(홍경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연구실, 1966)
  • ・ 대구광역시청(www.daegu.go.kr)
  • ・ 문화관광부(www.mct.go.kr)
  • ・ 문화재청(www.cha.go.kr)
  • ・ 전국문화원연합회(www.kccf.or.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100.daum.net

 

군위군(大邱廣域市 軍威郡)

시대유형분야

현대
지명/행정지명ˑ마을
지리/인문지리

요약 대구광역시 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영천시, 서쪽은 구미시, 남쪽은 칠곡군, 북쪽은 의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8°24'∼128°53', 북위 36°00'∼36°19'에 위치한다. 면적은 614.25㎢이고, 인구는 2만 412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180개 행정리(92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에 있다.

자연환경

군의 최남단에 팔공산(八公山, 1,193m)이 우뚝 솟아 있어 대구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며, 지맥(支脈)이 동북쪽으로 뻗어 청송군 · 영천시와의 경계를 따라 분수령을 이룬다. 군의 동부인 삼국유사면 일대는 선암산(船巖山, 879m) · 아미산(峨嵋山, 418m) · 조림산(鳥林山, 638m) · 매봉(800m) · 방가산(756m) · 화산(華山, 828m) 등 높이 600∼800m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부는 베틀산(369m) · 적라산(赤羅山, 252m) · 응봉산(鷹峰山, 279m) 등 200∼300m의 저산성 구릉지이고, 북부는 100∼200m의 낮은 구릉지이다.

위천(渭川)은 청송군 경계지역에서 발원해 삼국유사면 · 의흥면 · 우보면을 지나 북서류하다가 가산(架山) 북사면에서 발원해 효령면을 북류하는 사창천(社倉川)과 팔공산 북사면에서 발원해 부계면을 관통하고 효령면을 거쳐 북류하는 남천(南川)을 효령면 병수리에서 합한 뒤 다시 북류하다가 의성군 금성면에서 발원한 동천(東川)을 합류해 군의 중앙부를 북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본류로 흘러든다.

하천 양안에는 효령 · 군위 · 의흥 · 소보 등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남천유역은 효령면과 부계면이며, 하곡저에 형성된 좁은 충적평야는 경제적 중심지로서 하천 양안을 따라 사과재배가 활발하다.

내륙산간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하며, 강수량이 적다. 연평균기온 14.8℃, 1월 평균기온 0.8℃, 8월 평균기온 25.8℃이며, 연강수량은 1,222.4㎜이다.

역사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고고학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청동기시대 이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 결과 일찍부터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변진 24국 중 하나인 여담국

그 뒤 이 국가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이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가 노동멱현(奴同覓縣: 군위읍) · 모혜현(芼兮縣: 효령면) · 부림현(缶林縣: 부계면) 등으로 편제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 노동멱현은 군위현으로, 모혜현은 효령현(孝靈縣)으로 개명되어 숭선군(嵩善郡: 구미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후삼국의 쟁패기에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초기에는 왕건의 세력권에 들어가 고려의 군대가 이 곳에 주둔하였다. 928년(태조 11)견훤이 경졸(勁卒)을 뽑아 부곡성(缶谷城: 부계면)을 공격해 군사 1,000여 명을 죽이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고려 통일 이후 점진적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군현의 이합이 잦았는데, 이 지역은 독립 현을 구성하지 못하고 계속 또 다른 군현에 소속되었다. 곧 군위 · 효령 · 부계현은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때 모두 상주에 예속되었다가, 1143년(인종 21)일선현(一善縣: 선산군)에 이속되어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현재의 의흥면지역은 고려 이전의 유래는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고려 초에 의흥군이 되어 1018년에 안동부에 속해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고려 후기에 속현이 주현으로 승격될 때인 1390년(공양왕 2)군위현과 의흥군에 감무가 파견되어 비로소 독립행정단위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각기 효령현과 부계현을 속현으로 삼았다.

한편, 1284년(충렬왕 10) 국가에서는 국사 일연(一然)을 위해 의흥현(義興縣) 화산(華山)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논밭 100여 결을 하사함과 아울러 그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일연은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5년간 살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시 군위현 · 의흥현으로 정리되어 현감이 파견되었고, 그 뒤 조선 후기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조선 전기 이 곳의 토지는, 군위는 척박했고 의흥은 비옥 · 척박이 반반이었으며, 풍속은 검솔(儉率), 둔박(鈍朴)했다고 한다. 호구수는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군위가 390호 2,577명, 의흥이 424호 3,392명이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독립행정단위를 이룬 조선 전기부터 부계홍씨(缶溪洪氏) · 부계예씨(缶溪芮氏)가 상경종사(上京從仕)하면서 홍귀달(洪貴達) · 예승석(芮承錫)을 위시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이 곳 출신의 장사진(張士珍) · 이영남(李榮男) · 홍위(洪瑋) · 홍억제(洪億濟) 등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왜적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23부제가 실시되자, 두 지역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에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4등군으로서 경상북도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흥군이 폐지되어 오늘날의 군위군을 형성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항일의병투쟁이 전개되자 이 지역 주민들도 많이 참여해 항일투사 이현섭(李鉉燮)을 배출하고,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3월 25일 의흥장날을 기해 수백 명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73년선산군 산동면 도산동이 소보면에, 의성군 금성면 광현동이 군위면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군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부계면 고곡동 · 매곡동이 효령면에, 산성면 원산동 · 금양동이 의흥면에 편입되는 등의 행정관할구역의 조정이 있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이(里)로 명칭 변경했으며, 1989년 1월 1일소보면 대흥리가 군위읍에 편입되었다. 이후 1991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부계면 대율리가 대율1,2리로 분리되어 1읍 7면 179리를 관할하게 되었고 1996년 3월 13일에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군위읍 서부1리가 서부1,3리로 효령면, 고곡1리가 1,3리로 부계면 남산리가 남산1,2리로 각각 분리되어 1읍 7면 182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2023년 7월 1일자로 경상북도에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유물 · 유적

선사시대 유물로는 효령면 장기리에서 돌칼 ·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산성으로는 삼국유사면 화북리의 화산산성(경상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을 비롯해 부계면 남산리의 공산성성터, 군위읍 하곡리의 선방산성터, 의흥면 원산리의 성산성터, 삼국유사면 장곡리의 경림산성터, 효령면 성리의 성재산성 등이 있으며, 특히 화산산성 북문인 홍예문은 정교한 무지개모양을 이룬다.

불교문화재로는 제2석굴암이라 부르는 부계면 남산리의 군위삼존석굴(국보, 1991년 지정)을 비롯해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 군위삼존석굴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과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89년 지정), 삼국유사면 화북리의 군위인각사지(사적, 1992년 지정) · 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보물, 1965년 지정), 낙전리의 압곡사, 군위읍 상곡리의 지보사와 지보사삼층석탑(보물, 1980년 지정), 하곡리의 군위 하곡리 석조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소보면 달산리의 법주사와 법주사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 군위법주사왕맷돌(경상북도 민속자료, 1995년 지정), 위성리의 군위 위성리 석조약사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효령면의 군위불로리마애보살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삼국유사면 낙전리의 압곡사선사영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 의흥면 지호리의 수태사와 읍내리의 오층석탑, 우보면 달산리의 신흥사, 산성면 화본리의 군위 화본리 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군위읍 동부리의 군위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의흥면 읍내리의 의흥향교 대성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부계면의 군위대율리대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을 비롯해 군위읍 외량리에 송호서원, 내량리에 양천서원, 대북리에 남계서원 · 북산서원, 우보면 달산리에 봉강서원, 효령면 장군리에 제동서원, 부계면 남산리에 양산서원 · 문양서원과 남암 등의 서원이 있었다.

또한 소보면 내의리의 양암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소보면 봉황리의 광석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부계면 대율리의 상매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9년 지정), 군위읍 외량리의 칠탄숙강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이 있다.

이 밖에 부계면 남산리에 휘찬여사목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군위읍 외량리에 남양홍씨세보(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부계면 대율리에 백원첩(白猿帖), 창평리에는 500여 년 전에 축조한 남방지(藍坊池)가 있으며, 조선영조의 글을 보관하고 있는 의흥면 파전리의 어서각(御書閣), 김유신(金庾信)의 위패를 모신 효령면 장군리의 장군당, 군위군청 뜰의 척화비 등이 있다.

보호수로는 효령면 성리의 노송, 부계면 남산리의 은행나무, 의흥면 이지리의 느티나무, 우보면 나호리의 팽나무 등이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군위향교 · 의흥향교 · 효령향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군위읍 동부리에 군위향교와 의흥면 읍내리에 의흥향교가 있다. 서원으로는 남계정사(南溪精舍)라고 부르던 남계서원이 1868년 전국 서원 정리 때 서당으로 격하되었고, 송호서원(宋湖書院)은 철폐되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민족항일기에 공립으로 세워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7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3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도서관 2개소와 군민회관이 있으며, 군민회관은 문화회관과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중단되었던 박시놀이가 1984년부터 다시 행해지고 있다.

군위군은 과거에 초등학교로 쓰여진 (구)장군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하여 경북대학교와 연계하여 경북대 자연사박물관을 만들었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자연의 역사를 다양한 전시자료를 통해 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해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군위도립도서관과 군위군립도서관은 총 7만 여권의 도서와 2,000여 점의 자료를 관리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에는 ‘박시[搏歲]놀이’라는 특이한 민속놀이가 전한다. 이 놀이는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보(洑)를 만들어 놓고 물 대는 순서를 정하기 위해 양쪽 마을 남자들이 하던 시합으로 농한기인 정월에 열렸다.

양쪽 마을 대표끼리 미리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양쪽이 모두 장정을 선발한다. 먼저 한쪽 마을 사람 한 명이 상대 마을로 가서 방자하고 거만하게 길을 걸어가면 상대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을 때려서 돌려보내 싸움이 시작된다.

옆으로 늘어선 장정들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떼를 지어 어깨로 상대편 대열을 밀어붙이는 것인데, 밀리는 편이 지게 된다. 힘 대결을 벌이는 것이므로 부상자가 많이 나오지만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한다.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술과 음식을 대접받으며, 한 해 동안 보의 물을 우선 사용할 권리를 얻는다.

또한 의흥면에는 ‘지애밟기’라는 부녀자들의 놀이가 있는데, 안동의 놋다리밟기가 의성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정월보름에 주로 행해진다. 이 밖에도 장치기 · 지신밟기 · 줄다리기 등이 있다.

이 고장의 동제는 주로 정월보름에 시행되며, 동신제라고도 부른다. 이 동제는 성실하지 못하게 거행하면 마을에 나쁜 질병이 유행하고, 가축이 번식이 안 되고, 수재 · 화재가 일어나며, 흉년이 든다고 전해온다.

지난 일 년간 자기의 가족이나 친족이 사망하지 않고, 타인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정결한 남자 한 명을 읍장이나 마을의 유지가 제관으로 지명, 선정한다. 제관은 5일 전에 손톱과 머리를 깎고 매일 목욕을 하며, 육류와 술 · 담배를 금지하고, 매일 옷을 갈아입고 근신한다. 모든 동민은 3일 전부터 음주를 금하고 동제를 위해 정성을 다한다.

제단 부근과 제관집은 3일 전부터 청소를 하고, 제를 지내는 날 아침에는 금줄을 치고 적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물은 제관이 시장에 가서 부정하지 않은 상인으로부터 구입하며, 경비는 모든 동민이 골고루 분배해서 충당한다. 제를 지낸 아침에는 모든 동민이 음복을 하며, 이 때 대동회를 열기도 하는데, 동네의 풍기를 교화하고 농사에 대한 의논을 하며 기타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는 지명유래담과 효자설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가 많이 전한다. 효령면의 장군동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지명유래담이 전한다. 「호랑이를 잡은 효자설화」는 고려 때의 이야기이다.

이 고장에는 호환(虎患)이 속출해 조정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려 애를 썼으나 헛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살던 유공신(柳公信)이라는 선비가 백성을 구하고자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다가 오히려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아들 누백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서 잠든 호랑이를 잡고, 그 자리에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하루는 누백의 꿈에 유공신이 나타나 시를 읊었는데, 시묘가 끝난 뒤 누백이 응시한 과거의 과제(科題)가 그 시의 한 구절이었다. 그리하여 누백은 장원급제해 의종의 측근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였다.

「호랑이로 변한 효자설화」도 있다. 부계면 대율동 한밤에는 홍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효성이 지극한 효자가 있어 홍효자라 불렀다. 아버지가 이름 모를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황구(黃狗)의 신장 1천 개가 필요하다 하였다.

홍효자는 팔공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려 산신령에게 호랑이로 변하는 비결과 주문이 적힌 책을 얻었다. 밤이면 호랑이로 변해 개의 신장을 구해 왔는데, 밤이면 사라지는 남편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부인이 남편이 책을 보고 주문을 왼 뒤에 호랑이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책이 없다면 호랑이로 변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부인은 책을 불태워 버렸는데, 새벽에 돌아온 홍효자는 책이 없어져 버려 다시는 사람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었다. 호랑이가 된 홍효자는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돌아가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홍범이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퇴계설화」 · 「열녀설화」와 아기장수형 설화가 전하는데, 아기장수형 설화의 자취로는 불행하게 죽은 아기의 원한을 풀기 위해 세워 둔 비석이 군위읍에 남아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는 민요는 노동요가 주류를 이룬다. 농업노동요 중에서 「모내기노래」와 「논매기노래」는 비슷하게 많이 불린다. 「모내기노래」는 “서마지기 논배미에/반달겉이 미와낸다/지가무슨 반달일까/그뭄초승 반달이지.” 등과 같이 사설은 다른 지방과 비슷한 보편적인 것들이다.

「논매기노래」로는 집단유희요인 「치야칭칭 나네」가 사용되기도 한다. “앞소리사 못할망정/(후렴) 치야칭칭 나네/뒷소리나 울려주소(후렴)/달아달아 밝은달아(후렴)/이태백이 놀던달아(후렴).”에서와 같이 앞소리와 뒷소리로 나누어 부르고, 사설은 여러 노래의 것을 두루 이용하고 있다.

산악일대에서 나무할 때 부르는 남자들의 신세탄식요인 「어사용」도 있는데 「어사령」이라고도 한다. “팔자야 내팔자는∼ 칠자만도 못하구나∼/꾸꾸꾸꾸 까마귀∼ 두발가진 까마귀야∼……”와 같이 신세타령을 시작하면서 느린 가락으로 슬프게 부르고, ‘∼’부분은 길게 빼면서 더욱 구성지게 부른다.

여성노동요도 많이 전해지는데, 「밭매는 노래」는 “불같이도 덥은 날에/뫼겉이도 지슨밭을/한골매고 돌아봐도/두골매고 도라보이.”라고 작업과정의 괴로움을 말하고, 이어서 신세한탄이나 시집살이의 고됨을 노래한다.

길쌈노동요 중 “연당군아 불밝혀라/칠월질삼 늦어간다/청도밀양 진삼가래/와룡산 높은진게/이리저리 걸어놓고/자고싶은 잠못자고/비비치고 나리치고/고이곱기 하여가주/시아바님 도초하고/우리낭군 일습하자/얼씨구좋다 정말로좋아/다리가아파져도 나는좋아.”라고 한 「삼삼기노래」는 청도 · 밀양까지 나갈 수 있을 만큼 긴 삼가락을 무릎에다 비벼 삼을 삼는 과정과 옷을 해주겠다는 기쁨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른다는 여인네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베 짤 때 부르는 노래에는 「베틀노래」 등이 있는데, 사설은 보편적인 베틀놓기 · 베짜기 · 남편부음듣기 등으로 구성된다. 「언문뒤풀이」가 많이 전해지는데, “가련할사 임의정은/그연금일 돈절하다/고은임은 그려두고/구정인들 잊을소냐/너죽어도 나몬살고/나죽어도 니몬산다/노노하고 절통한말/누굴대여 다할쏜고……”와 같이 어희적이기보다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길게 계속되어 길쌈노동에 불린다.

이 밖에도 동요 · 유희요 등이 전해지고, 「화전가」 · 「수심가」 · 「쌍금쌍금 쌍가락지」 · 「화투노래」 등 여성들의 노래가 많이 전해지는데, 사설의 내용이 풍부하고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산업 · 교통

총경지면적은 8,070㏊로 전체면적의 13.1%를 차지한다. 논이 4,476㏊로 55.5%를 차지하고 밭이 3,594㏊로 44.5%를 차지해 논농사가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위천유역에 위치한 군위읍 · 소보면 · 효령면 · 우보면 · 의흥면 등지의 평야지대에서는 쌀 · 보리의 주곡을 주로 생산하며, 이들 지역에 관개용수인 백학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그리고 이 유역에서는 옥수수 · 메밀 등의 잡곡과 팥 · 콩 · 감자 · 고구마를 생산한다.

채소류로는 수박 · 오이 · 가지, 엽채류로는 배추 · 부추 · 상추 · 미나리, 근채류로는 무 · 우엉, 조미채류로는 양파 · 마늘 · 고추, 특용작물로는 참깨 · 땅콩, 과실류로는 사과 · 포도 · 복숭아가 주로 생산된다. 빛깔 곱고 당도 높은 군위사과는 맛이 좋기로 이름 나 있으며 능금주스로도 제조되어 판매된다. 대구약령시의 영향으로 모란 · 작약 · 지황 · 시호 · 질경 등의 약초재배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마늘 · 양파 · 사과이다. 특산품으로는 사과 이외에도 삼국유사면 화산 정상의 비탈길에서 재배되는 고랭지채소와 소보면 달산리 청화산(靑華山) 남쪽 기슭의 쇠점삼밭[鐵店蔘田]에서 재배되는 인삼 · 식용마, 군위장터의 대장간에서 만드는, 날이 얇아 사용할 때 힘이 별로 들지 않는 호미 · 괭이 · 낫 · 쇠스랑 · 칼과 꽃돗자리 등이 있으며, 특히 진박골 꽃돗자리는 수백 년 전부터 아주 유명하다. 우보면 나호리 속칭 진박골에서 주로 생산되는 의흥종왕골은 줄기가 가늘고 부드러우며 광택이 있고, 껍질을 가늘게 쪼갤 수 있어 돗자리와 꽃방석 · 손가방 등의 제조에 사용된다.

2008년 현재 임야면적은 전체면적의 75.6%를 차지하고 입목축적은 348만 7803㎥이며, 임산물 생산량은 종실이 32만 8417㎏, 버섯이 13만 6400㎏으로 주로 삼국유사면 · 효령면 · 부계면 · 산성면에서 많이 생산된다. 농공단지는 군위농공단지와 효령농공단지가 있으며, 두 단지의 면적은 40만 4078㎡이고 모두 56개 업체에 890명이 일하고 있다.

상업활동은 모두 5일 정기장이다. 1930년대 군내에는 4일과 9일에 원계(圓溪) · 화곡(花谷) · 효령 · 어염(於鹽)에서, 5일과 10일에 군위읍 · 의흥에서, 10일장이 신원(薪院)에서 열렸으며, 주로 농산물 · 가축 · 해산물 등이 거래되었다. 1895년경까지 군내의 시장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며, 1920년 후반에 산성장(山城場)과 학성장(鶴城場)이 개설되었다.

광복 후 정기시장이 크게 증가해 1957년에 11개, 1959년에 13개로 늘어났으나, 1960년 이후 교통 · 통신의 발달과 경제발전에 힘입어 상설점포는 증가한 반면 정기시장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군내의 정기시장은 1981년석산장(石山場)이 폐지되고, 1985년에는 군위 · 소보 · 효령 · 구효령 · 신원 · 대율 · 우보 · 의흥 · 화본 · 학성 등에 5일장이 남아 있었다. 2009년 현재는 소보장이 2 · 7일, 군위장이 3 · 8일, 우보장이 4 · 9일, 의흥장이 5 · 10일에 열리고 있다.

장터에서는 사과 · 고추 · 마늘 · 무 · 배추 · 돗자리를 비롯해, 복숭아 · 감 · 땅콩 · 참깨 · 돼지 · 소 · 염소 등이 거래된다. 군위장에서는 사과 · 황도 · 반시 · 땅콩 · 소 · 염소 · 개 · 돼지 등이 집산되며,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 거래되는 사과는 맛이 좋기로 이름 나 있다. 1994년 현재 군위 · 소보 · 효령 · 부계 · 우보 · 의흥에 7개의 정기시장이 서고 있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인 28호선이 철도와 거의 같이 지나, 또 5호선이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 대구와 연결되고, 그 외에도 지방도가 대구와 구미로 연결된다. 또 중앙고속도로, 상주영천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관광

이름 난 관광지는 적으나 팔공산 · 화산을 비롯한 수려한 산악관광자원과 많은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부계면 남산리의 삼존석굴 · 삼존석굴모전석탑과 남산계곡, 대율리의 자연경관이 뛰어난 한밤성안과 막암, 삼국유사면 화북리의 학소대 · 인각사와 화산산성, 군위읍 상곡리의 선방산 지보사, 소보면 달산리의 청화산 법주사 등이 있다.

팔공산맥이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남산리에 높다랗게 치솟은 바위벽 속에 들어선 삼존석불은 493년(신라 소지왕 15년)극달화상이 창건했는데, 석굴 입구는 가로 4.25m, 세로 4.3m로 둥글게 뚫려 있으며, 내부 바닥은 사각형을 이룬다.

석굴 안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서 있다. 삼존석굴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석굴 앞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군위삼존석불모전석탑이 있다.

남산계곡은 팔공산의 명소로 손꼽히는 계곡으로 주변 송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어, 여름철이면 피서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유명한 곳이다. 학소대(鶴巢臺)는 위천 상류에 위치한 백학의 서식처로, 옛날에는 많은 백학들이 둥우리를 치고 서식했다고 해 학소대라 부른다.

위천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642년(선덕여왕 11)의상대사가 세운 사찰로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 『삼국유사』를 낳은 유서 깊은 사찰 인각사가 있는데, 주위에 수십 층의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아래에는 맑고 깊은 소(沼)가 있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백학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지금도 운치 있는 절경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삼국유사면에서 덩치가 가장 큰 화산 산정부의 평지에는 1709년(숙종 35년) 병마절도사 윤숙이 전쟁에 대비해 쌓은 석성인 화산산성, 그리고 옥정영원(玉正靈源)이라 부르는 석간수가 있다. 선방산(船放山) 중턱에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지보사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지보사삼층석탑이 있다.

청화산에서 원뿔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초봉의 남쪽 기슭에는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보광명전 앞마당에는 5층석탑과 왕맷돌이 있다. 한밤성안은 부계면 대율리 입구 일대의 소나무숲으로, 대율초등학교 정문까지 도로 양쪽의 평지 약 5,000여 평에 2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노송 수백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계절에 따른 송림의 절경이 아름다우며, 팔공산을 비롯한 주위의 높고 푸른 산, 계곡의 맑은 물, 소나무 사이에 흩어진 작은 암석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 외에 유성룡 · 홍천뢰 · 장현광 등이 휴양했다는 병암(屛巖) · 용아곡(龍牙谷) · 도연폭포(陶淵瀑布) · 아미산, 매봉산의 신흥사 등이 있다.

읍 · 면

군위읍(軍威邑)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84.08㎢, 인구 8,428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동부리이다. 본래 군위군의 읍내가 되므로 현내면(縣內面)이라 해 오항(烏項) · 아천(鴉川) · 성지(城旨) · 노상(路上) 등 10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 · 서성면 · 소보면, 의성군의 억곡면 등의 일부를 병합하고 군위면이라 하였다. 1973년의성군 금성면 광현동을 편입하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읍의 동쪽에 선방산(船放山, 437m) · 마정산(馬頂山, 402m), 서쪽에 물부리산(무담산, 454m) 등이 읍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긴 분지를 형성한다. 그 중앙을 위천(渭川)이 흐르며 의성군 금성면에서 발원한 동천이 위천과 합류하고, 위천을 따라 좁고 긴 곡저에 경지와 중심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총경지면적 12.96㎢로 15.4%, 임야면적 56.85㎢로 67.7%, 기타 16.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8.33㎢로 64.3%를 차지하고 밭이 4.63㎢로 35.7%를 차지해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인 쌀 · 보리 외에 사과 및 채소류의 재배도 활발하다. 또한 대추 · 도토리 · 산나물 등의 임산물이 생산되고, 한우와 젖소 · 개 · 돼지 · 토끼 · 닭 등의 가축사육이 활발하다.

도로는 대구∼안동간의 국도가 읍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해 대구와는 통근권 내에 있고, 금성∼소보간의 군도가 읍의 동서를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외량리의 송호서원, 상곡리의 지보사, 하곡리의 석조여래입상, 동부리의 군위향교, 대북리의 남계서원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삼국유사면(三國遺事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4.61㎢, 인구 1,3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학성리이다. 본래 의흥군에 속한 지역으로 소수면(小首面)이라 해 여덕(汝德) · 하회(河回) · 인각(麟角) · 덕천(德泉)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소야면(巢野面)과 파립면(巴立面)의 일부를 병합해 고려시대의 고로곡부곡(古老谷部曲)의 이름을 따서 고로면이라 개칭하고 군위군에 편입되었다. 2020년 1월 삼국유사면으로 개칭하였다.

대부분의 면계에 화산(華山, 828m) · 선암산 · 조림산 · 매봉(800m) · 뱀산(834m) · 방가산(758m) 등 600∼800m의 급사면에 둘러싸인 고위평탄면이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현재 개척촌이 형성되어 밭농사를 주로 한다. 수지상(樹枝狀)의 하계(河系)를 가지는 위천 상류가 산지를 개석해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 9.57㎢로 8.4%, 임야면적 98.50㎢로 86.0%, 기타 5.6%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3.28㎢로 34.3%를 차지하고 밭이 6.29㎢로 65.7%를 차지해 밭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과실류와 채소류의 생산이 많으며, 특히 파 · 가지의 생산이 많다. 또한 호두 · 대추 · 도토리 · 표고버섯 · 산수유 · 산나물 등의 임산물이 생산되며 한우 · 개 · 토끼 등의 가축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괴산리에서는 이 밖에도 약초 · 잎담배를 재배한다.

도로는 왜관∼죽전간의 지방도가 면의 중앙부를 통과하고, 고로∼춘산간의 군도가 면의 북부지역을 통과해 의성군과 연결되며, 영주∼포항간의 국도가 면의 서쪽을 통과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화북리의 인각사 경내에 왕희지(王羲之)의 친필인 보각국사비가 있고, 낙전리에 압곡사와 압곡사선사영정이 있다. 또 화산에는 약수탕, 인각에는 물탕이 있으며 장곡리에는 장곡휴양림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부계면(缶溪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81㎢, 인구 2,0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평리이다. 본래 의흥군 부계현에 속한 지역으로 현내면이라 해 구방(九方) · 신원(薪院) 등 8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남면 · 부서면, 칠곡군의 동북면, 군위군 효령면의 일부 동을 병합해 옛 현의 이름을 따서 부계면이라 하고 군위군에 편입되었다.

남동단에 팔공산(八公山, 1,193m)이 위치하며, 그 주령이 면의 남부경계를 이룬다. 남천과 그 지류인 사창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 6.29㎢로 9.7%, 임야면적 51.72㎢로 79.8%, 기타 10.5%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3.06㎢로 48.7%를 차지하고 밭이 3.74㎢로 51.3%를 차지해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인 쌀 · 보리 외에 구릉성 산지의 산록에서 무 · 배추 · 양배추 등의 채소류가 생산되며, 감 · 사과 · 배 · 복숭아 등의 과실류도 재배된다. 밤 · 표고 · 산수유 등의 임산물 생산과 양봉 · 산양사육이 활발하다. 남산리에서는 약초와 버섯이 많이 나며, 딸기가 많이 생산된다.

도로는 언양∼우보간의 지방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왜관∼죽전간의 지방도가 창평리에서 갈라져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해 대구와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남산리에 남산서원을 비롯해 삼존석굴이 있는데 석굴은 경주의 석굴암보다 50년 앞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며, 군위삼존석불모전석탑이 있다. 창평리에 문양서원, 도산리의 산내마을팔공산에 오도암(梧道庵)이 있으며, 남산리에 휘찬여사목판, 대율리에 대청 등이 있다. 이 밖에 문암서당(文巖書堂) · 부계서당(缶溪書堂) · 출남정(出南亭) · 보원당(報遠堂)이 있다. 매곡리의 수동마을에는 피부병에 좋다는 약물탕이 있으며, 대율리에는 부림홍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산성면(山城面)

군의 중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77㎢, 인구 1,26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화본리이다. 본래 의흥군에 속한 부계현의 동쪽이 되므로 부동면(缶東面)이라 해 여좌(余佐) · 아치(牙致) · 신령(薪嶺) · 범중(凡中) 등 11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남면 · 중리면 · 소수면의 일부 이를 병합해 팔공산성(八公山城)의 이름을 따서 산성면으로 개칭하였다. 동쪽의 조림산과 남단의 시루봉(714m)이 최고봉으로 이들 산지에서 뻗어 나온 구릉성 산지가 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위천의 지류인 구천(九川)이 산지를 침식해 하천연안에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다.

총경지면적 6.80㎢로 18.5%, 임야면적 26.52㎢로 72.1%, 기타 9.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3.06㎢로 45.0%를 차지하고 밭이 3.74㎢로 55.0%를 차지해 밭농사가 조금 더 많은 비중을 이룬다. 무 · 파 · 호박 등이 많이 생산되며, 유지작물과 참외 · 수박 · 고추 등의 특용작물도 재배된다. 호두 · 대추 · 산나물 · 도토리 등의 임산물과 산양사육도 활발하다.

교통은 예로부터 의성 · 안동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며, 현재는 중앙선과 산성∼우보, 산성∼점곡간의 군도가 남북으로 통과해 영천 · 의성 · 안동 방면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운산리의 산성마을에 팔공산성의 북문터가 남아 있다. 백학리 입구에는 김녕김씨의 효자각이 있고, 부처가 목욕을 했다는 불목골, 봉림역 남쪽에 만모정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소보면(召保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1.30㎢, 인구 2,39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원리이다. 본래 군위군에 속했던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으로 조선시대에 소본면(召本面)이라 해 대흥(大興) · 농암(籠巖) · 상소(上召) 등 10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본면 또는 석을본면(石乙本面) · 화곡면(花谷面), 구미시의 산동면(山東面) 일부를 병합해 소보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면의 중앙부를 곡정천(谷亭川)이 곡류하며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다. 하천을 따라 농경지 및 취락이 분포해 있다.

총경지면적 13.67㎢로 13.5%, 임야면적 75.70㎢로 74.7%, 기타 11.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9.22㎢로 67.4%를 차지하고 밭이 4.45㎢로 32.6%를 차지해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경지면적이 군내에서 가장 넓으며, 채소류의 재배도 활발해 호박 · 고추 · 가지 · 당근의 생산이 많다. 위성리에는 1992년에 세운 국내 유일의 사과연구소가 있어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사과재배법과 병충해예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도로는 모동∼현서간의 지방도와 구미∼비안간의 군도가 면의 중앙부에서 교차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내의리에 양암정, 위성리에 동암정(東巖亭) · 삼수정(三水亭), 보현리에 백련암 · 백운암과 효자각, 달산리에 법주사 등이 있으며 위성리에는 삼대석(三臺石) · 삼대목(三臺木) · 삼대불(三臺佛)이 있다. 또한 피부병에 좋다는 까치리약수터와 희일 북동쪽에 장수샘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우보면(友保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9.98㎢, 인구 2,06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화리이다. 본래는 의흥군에 속한 지역으로 우보면이라 해 봉강(鳳岡) · 고산(高山) · 무둔(武屯) · 원당(院堂) 등 10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화면(乃化面) · 우산면(牛山面), 의성군 산운면(山雲面), 군위군 중리면(中里面)의 일부 동을 병합해 우보면이라 하고 군위군에 편입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면의 북쪽에 왕제산(旺齊山, 320m) · 국통산(國通山, 337m) 등이 있다. 면의 중앙부를 관류하는 위천을 따라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농업생산지를 이룬다.

총경지면적 9.61㎢로 16.0%, 임야면적 43.55㎢로 72.6%, 기타 11.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95㎢로 51.5%를 차지하고 밭이 4.66㎢로 48.5%를 차지해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인 쌀 · 보리 외에 토마토 · 마늘 · 고추가 생산된다. 그 밖에도 양배추와 섬유작물의 생산이 많으며, 군내 유일의 왕골생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나호리의 진박골에서 생산되는 왕골은 군위 특산품인 돗자리에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젖소 · 닭 · 한우의 사육도 활발하다. 도로는 중앙선과 산성∼우보간의 군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언양∼우보간의 지방도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통과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달산리에 봉강서원 · 신흥사 · 윤효자비(尹孝子碑) 등이 있다. 봉산리 북당골에는 옻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옻물샘이 있으며, 나호리에 월성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의흥면(義興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17㎢, 인구 2,6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읍내리이다. 본래 의흥 군청이 있던 곳이므로 중리면(中里面)이라 해 읍상(邑上) · 읍하(邑下) · 노하(路下) 등 6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리면 · 파립면과 소수면의 일부를 병합해 의흥면이 되었다.

파전리에 진산인 용두산(142m)이 있으며, 지형은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은 동고서저의 말굽형 형상이다. 최고봉은 북동단의 선암산(船巖山, 879m)이며, 면의 중앙을 흐르는 위천을 따라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 10.46㎢로 19.3%, 임야면적 36.29㎢로 67.0%, 기타 13.7%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5.75㎢로 55.0%를 차지하고 밭이 4.71㎢로 45.0%를 차지해 논농사가 좀 더 놓은 비중을 이룬다. 경지율이 군내에서 가장 높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외에 양파가 많이 생산되고, 무 · 배추 · 호박 등도 소량으로 생산된다. 한우와 돼지의 사육도 많이 한다. 도로는 영주∼포항간 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통과해 영천 · 의성 · 안동 방면과 연결되고, 산성∼점곡간 군도가 남북의 인접면과 연결되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신덕리의 극락암, 읍내리의 광풍루(光風樓) · 대월루(對月樓) · 의흥향교가 있으며, 수서리 솔뫼 남쪽의 선창, 수북리의 수각정(水閣亭), 매성리의 자연정, 파전리의 어서각 등이 있다. 수북리에는 구산박씨(龜山朴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효령면(孝令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98.46㎢, 인구 3,96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구리이다. 본래 군위군에 속한 효령현의 땅이므로 효령면이라 해 내동(乃東) · 내서(乃西) · 장기(場基) 등 17개 이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리면(中里面), 의흥군 부서면(缶西面) · 우보면의 일부 동을 병합해 옛 이름을 따서 효령면이 되었다.

위천의 북쪽에 국통산(國通山, 337m)과 마정산(馬頂山, 402m) · 적라산(赤羅山, 252m) · 응봉산(鷹峰山, 279m) 등을 연결하는 산릉이 면계를 둘러싸고 있으며, 면의 대부분은 매봉산(梅峰山, 489m)을 최고봉으로 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면의 중앙을 남동에서 북서로 남천이 흘러 유역에 띠모양의 평야가 발달해 있다.

총경지면적 11.99㎢로 12.2%, 임야면적 75.67㎢로 76.8%, 기타 11.0%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6.72㎢로 56.1%를 차지하고 밭이 5.27㎢로 43.9%를 차지해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외에 무 · 배추 · 호박 · 파 등의 채소류와 유지작물이 있다. 밤 · 대추 등의 임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한우 · 젖소 · 돼지 · 개 · 닭 등의 사육과 양봉도 활발하다.

도로는 마산∼중간진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해 군위 · 대구와 연결되며, 동쪽으로는 언양∼우보간 지방도가 영천 · 의성과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불로리에 마애보살입상, 거매리에 피부병에 좋다는 박태약수터, 장군리에 장군당 · 제동서원, 오천리에 삼빙정(三氷亭)이 있다. 중구리에는 연안이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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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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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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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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