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0. 03:53ㆍ■ 불교/사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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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韓佛敎曹溪宗(대한불교조계종)
⇨ 우리나라 불교 18개 종단 중 최대 종파.
정확한 종조(宗祖)는 밝히기 어려우나 신라 말의 도의(道義)·범일(梵日) 등에서 종파의 연원을 찾고 있다.
1406년(태종 6) 나라에서 총지종과 조계종을 합하여 조계종이라 하였다.
1424년(세종 6)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해서 선종(禪宗)이라 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해서 교종(敎宗)을 만들게 함에 따라 조계종의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연산군 때 선교양종마저 폐지된 채 조계종의 정신을 이은 선(禪) 중심의 불교가 면면히 이어졌다.
1895년 4월 승려의 도성(都城) 입성이 허락되자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한국불교 총종무원으로 삼았으며, 1902년 국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여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보호하였다.
1908년 3월 전국 승려대표자 52명이 한국불교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이라 하였고, 1910년 서울 수송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창건하여 조선불교중앙회무소 겸 중앙포교소를 두었다.
1911년 1월 영·호남의 승려들이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하려는 원종을 거부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세웠으며, 1911년 6월 총독부에서 사찰령을 반포하게 됨에 따라 원종과 임제종은 자연히 소멸되고 30본산이 중심이 된 30본산연합사무소가 1915년 초에 설립되었다.
1922년 1월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치하였고, 1922년 5월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설립하였으며, 이들 종무기관 사이에 대립이 심해지자 서로 협의하여 1925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으로 통합하였다.
1938년 총본산으로 지금의 조계사(曹溪寺) 전신인 태고사(太古寺)를 창건하고 총독부가 정한 조선불교 선교양종의 명칭을 버리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조계종을 종명으로 삼았다.
1941년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조선불교조계종이라 하였고, 이때부터 조계종 종조에 대한 논란이 크게 대두되었다.
1945년의 광복 직후부터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가 시작되어 큰 혼란을 빚었으나 교계의 고승들과 정부의 노력으로 1962년 3월 조계종 재건 비상종회를 열어서 종헌을 제정, 공포하여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1962년 12월<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단체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출가와 재가승의 생리가 다르고 그 방향이 같지 않았으므로 2년 뒤 대처승들은 또 다시 이탈하여 한국불교조계종이라는 명칭으로 간판을 걸고 사찰재산과 종권의 쟁탈을 위한 소송을 계속하였다.
1969년 대법원에서 조계종의 종권이 비구승에게 있음을 판결하게 되자 대처승들은 1970년 1월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은 비구승의 종단으로 독립되었다.
이 종파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중생에게 널리 진리를 전파하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으며, 『금강경』과 전등법어(傳燈法語)를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고 있다.
신라 말의 도의를 종조로 삼고 고려의 지눌을 중천(重闡)으로 하여 고려 말의 보우(普愚)를 중흥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종조에 관해서는 1942년 이후 현재까지 학계 및 불교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권상로(權相老)·김영수(金映遂) 등이 처음 종조를 정할 때는 휴정(休靜)의 제자인 해안(海眼)의 설을 취하여, 휴정이 중국 임제종의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이어받은 보우의 법맥이 혼수(混修)―각운(覺雲)―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으로 이어졌으므로 조계종의 중흥조는 보우가 되어야 한다.
보우가 선종의 구산문(九山門) 중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출가하였으므로 가지산문의 창시자인 도의를 종조로 삼아야 한다고 계속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열(李在烈)·이종익(李鍾益) 등은 1213년(강종 2) 국가에서 최초로 조계종이라는 공칭을 사용하였고 그 종명은 송광사의 지눌의 문도들에 국한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지눌을 종조로 삼아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 종단은 총무원·포교원·교육원·중앙종회를 중앙조직으로 하고 전국에 25개 교구본사를 두어 1997년 말 현재 2,033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으며, 승려 수는 1만 2,000명, 신도 수는 1,513만 1,206명, 포교당은 153개소이다.
산하단체로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대한불교청년회·대한불교조계종 등이 있으며, 유관단체로는 재단법인 선학원 등이 있다.
종단 소속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대학교 2개교, 중고등학교 18개교, 종단 소속 사회사업기관으로는 유치원 16개소, 유아원 4개소, 고아원 2개소, 양로원 1개소가 있다. → 조계종
⇨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063
■ 20221202 FRI 大韓佛敎 曹溪宗 載藥山 表忠寺(Pyochung Temple)
■ 표충사 삼층석탑
표충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467호. 높이 770㎝.
이 석탑은 기단·탑신·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폭이 좁은 지대석 위에 놓여진 기단은 단층으로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기단보다도 높아 고준한 느낌을 준다.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는 약간 둔중해 보이며 모서리에는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 등이 차례로 얹혀 있는데 나중에 후보된 것도 있으며 그 위에는 철제 찰주가 있다.
이 석탑은 기단이 단층인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에서 약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5년 6월 1일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석탑의 해체 보수 공사 중에 1층 탑신부에서 금동불상, 유리구슬, 명문석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석에 적힌 글자를 판독한 결과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라는 제하의 글로 1491년 삼층석탑의 개수 내력을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 표충사 대광전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 大韓佛敎 曹溪宗 載藥山 表忠寺(대한불교 조계종 재약산 표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단장면 구천리 23)
전화 : 055-352-1150
※ 표충사 :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
⇨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寺) 더 보기
밴조선 커뮤니티 :: 밴조선 카페 > 포토사랑 > ■ 대한불교 조계종 재약산 표충사 (vanchosun.com)
■ 載藥山 表忠寺(재약산 표충사) 영정사, 천황산표충사
시대 : 조선
유형 : 유적
분야 : 종교·철학/불교
요약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재약산(載藥山)에 있는 조선시대 승려 사명대사 유정 관련 사찰. 시도기념물.
☛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 ·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 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 · 취안(翠眼) · 최심(最心) · 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 서쪽에 기허당을 각각 모셨다.
또한, 원불전(願佛殿) · 노전(爐殿) · 예제문(禮制門) · 의중당(義重堂) · 자하문(紫霞門) · 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 · 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 · 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남계료(南溪寮)는 심검당(尋劒堂)으로, 원통료(圓通寮)는 설법당(說法堂)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나한전(羅漢殿) 등은 그대로 두었다.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청동 은입사 향완(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이 밖에도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과 삼층석탑 출토 유물(보물, 2017년 지정), 사명대사의 금란가사(錦襴袈裟)와 장삼(국가민속문화재, 1973년 지정), 표충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고승진영 및 팔상도
참고문헌
・ 『표충사사적비(表忠祠事蹟碑)』
・ 『밀양영취산중흥사표충사지(密陽靈鷲山重興寺表忠祠誌)』
・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朝鮮總督府, 1919)
・ 「호국대성사명대사연구」(김동화 외, 『불교학보』8, 1971)
⇨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027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寺)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載藥山) 남쪽에 있는 절.
- 표충사삼층석탑
- 표충사청동은입사향완
- 표충사 대광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 흥덕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자 왕이 기뻐하고 대가람을 이룩한 다음 절 이름은 영정사(靈井寺), 산 이름은 재약산으로 바꾸었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1839년(헌종 5)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月坡)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표충사(表忠祠)로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1926년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埦 : 국보 제75호)·3층석탑(보물 제467호)·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 표충사삼층석탑
표충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467호. 높이 770㎝.
이 석탑은 기단·탑신·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폭이 좁은 지대석 위에 놓여진 기단은 단층으로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기단보다도 높아 고준한 느낌을 준다.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는 약간 둔중해 보이며 모서리에는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 등이 차례로 얹혀 있는데 나중에 후보된 것도 있으며 그 위에는 철제 찰주가 있다.
이 석탑은 기단이 단층인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에서 약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5년 6월 1일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석탑의 해체 보수 공사 중에 1층 탑신부에서 금동불상, 유리구슬, 명문석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석에 적힌 글자를 판독한 결과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라는 제하의 글로 1491년 삼층석탑의 개수 내력을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제75호)
표충사에 있는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향완.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27.5㎝, 입지름 26.1㎝.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된 불교공예품의 하나로 명문이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형태는 넓은 전이 달린 완형의 몸체에 나팔형의 받침을 갖춘 고배형이다.
향완 전체에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넓은 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범자가 새겨진 6개의 원이 있고 그 사이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체에는 역시 범자가 새겨진 4개의 원이 있으며 턱이 있는 밑부분에는 굵은 윤곽선 안에 가는 평행선으로 표현된 중판 앙련이 입사되어 있다.
받침에는 운룡무늬[雲龍紋]가 회화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넓은 전의 뒷면에 새겨진 57자의 명문에 의해 1177년(명종 7)에 만든 것으로 용흥사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향완은 비례가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이용하여 문양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은입사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3p3744b
■ 나의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도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며
저녁 잠자리에 들 때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게 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19950101(음1201) SUN
Mundy Sung
■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영정사)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이미 폐사가 된 영정사 자리(현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 人生(인생)
人生事(인생사) 先後(선후) 緩急(완급) 輕重(경중)이 있습니다.
우리네 人生(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 주거나 누구도 대신 아파 주거나 죽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 싶을 때 갈 수가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을 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奇跡(기적)은 아무에게나 어디서나 함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면 計劃(계획)과 實踐(실천)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잘 생각하고 判斷(판단)해서 몸 가는 대로 行動(행동) 하고 實踐(실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될 것입니다.
다만, 嚴重(엄중)한 現實(현실)앞에 우선순위를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에 愼重(신중)을 기해서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人生事(인생사) 刹那(찰나)와 彈指(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最善(최선)입니까?
인생의 眞理(진리)는 오직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건강하세요.
가족의 健康(건강)과 가정의 幸福(행복)을 축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19991212(陰1105) SUN
Mundy Sung
■ 재약산 표충사(載藥山 表忠寺) : 전경 사진 및 기사 출처 : 나무위키
1. 개요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구천리)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유정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표충사 일원은 1974년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됐다.
2. 역사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원효스님이 터를 잡아 창건한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신라 흥덕왕 4년때 인도 스님인 황면(黃面)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하였다.
당시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중, 이곳 죽림사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여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여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고, 사찰명을 영정사라 명명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 표충사는 보우, 해린, 일연, 천희 등 사대 국사가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국내 제일의 선찰로 번창했고, 고려 충렬왕이 이곳을 찾아 찬탄하고 일국지명산, 동방제일 선찰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일연 국사가 삼국유사를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전한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영정사)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이미 폐사가 된 영정사 자리(현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10.27 법난의 피해 사찰 중 하나이며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표지가 절에 세워져있다.
현대에 들어 표충사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 대선사가 주석하다가 1966년에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1946년 여름, 김원봉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적이 있다.
조선의열단 단장이자 조선의용대의 대장을 지냈던 항일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과도 인연이 있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다니던 동화중학교가 폐교된 뒤에 이곳에 와서 1년 정도 머물렀으며, 손자병법, 오자병법 등의 고전 병서를 읽으면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고.
# 해방 이후 귀국해 전국을 돌며 순회연설을 하는 중에 밀양을 찾았을 때도 표충사를 방문했었다.
아들과 표충사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기도 하다.
3. 문화재
국보 제75호 청동함은향완
만일루
보물 제467호 표충사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사 석등
국보 제75호인 청동 은입사 향완(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4. 찾아가는 법
밀양시는 기차가 발달한 도시이다.
기차를 타고 밀양역에 도착한 후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밀성여객에서 운행하는 매시간 있는 표충사 가는 버스를 타면 갈 수있다.
다만 표충사 입구까지 운행하지 않고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공영주차장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한참 동안 걸어가야 한다.
또한 표충사 출발 배차 시간이 있기 때문에도 돌아가는 길에도 표충사에서 출발하는 시간표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자동차로 갈 시에는 입구에 있는 정산소에서 주차요금 및 입장료를 내고 근처의 주차장에 주차하고나서 들어갈 수 있으며 최근 표충사 가는 길 쪽에 놀이터를 설치하여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 출처 : https://namu.wiki/w/%ED%91%9C%EC%B6%A9%EC%82%AC
■ 無畏(무외) 無碍(무애)
밝은 대낮에 달이 뜨고 어두운 밤 해가 있더라.
본디 우주는 낮과 밤이 없었거늘
사람 사람마다 금을 긋고 담장 쌓아 칸을 만들어 제 마음대로 해놓더라.
무애,
무애,
無碍.
해가 중천에 떴더라.
밤에 뜨는 달도 낮에 떠 있더라.
본디 무엇이 낮에 있고 무엇이 밤에 있는 것이 어디 있었으랴
내가 그것을 보았을 뿐일 진데.
사람들이 괜스레 해가 떴다 달이 떴다 하더라.
무외,
무외,
無畏.
20041212(陰1101) SUN
Mundy Sung
☀ ‘無碍, 無畏’의 主敵은 ‘三災八難 憂患疾病’
■ 만일루
■ 나의기도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나의 믿음에 간절하게 기도 하는 것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슬기로운 생각과 현명한 판단,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인생의 진리는 오직 살아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건강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 행복과 생존은 各自圖生(각자도생)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지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20020416 TUE
Mundy Sung
■ 재약산(載藥山)
재약산(載藥山)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1,119.1m의 산이다.
영남 알프스의 일부이다.
인근 천황산과 함께 재약산으로 묶어서 천황산을 재약산 사자봉으로 재약산을 재약산 수미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년고찰 표충사 뒤에 우뚝 솟은 재약산(주봉 : 수미봉 1119.1 m)은 영남알프스 산군 중 하나로 사자평 억새와 습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산세가 부드러워 가족 및 친구들과 가볍게 산행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명산이다.
인근에 얼음골, 호박소, 표충사, 층층폭포, 금강폭포 등 수많은 명소를 지니고 있으며, 수미봉, 사자봉, 능동산, 신불산, 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억새능선길은 가을 산행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힐링 길이다.
밀양 재약산 사자평 고산습지(密陽載藥山獅子坪高山濕地)
산들늪(면적 580,000㎡)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1번지 재약산 일원에 위치한 고산습지.
밀양 재약산 사자평 고산습지는 약 580,000㎡로 국내 최대 규모의 산지습지이다.
재약산 정상부의 평탄한 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재약산 산들늪’으로도 알려져 있다.
2006년 12월 28일에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습지보호지역은 해발 1,000m 이상의 산지가 연이어 나타나는 영남알프스 지역의 재약산 수미봉(1,119m) 정상에서 남동쪽 능선부에 위치한다.
영남알프스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그리고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걸쳐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로 이어진 산지를 일컫는다.
이 일대의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유천층군에 속하는 석영안산암과 응회암, 집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대부분 석영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자평 고산습지에서는 과거 농경지로 이용되던 지역이 습지로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고사리 분교를 비롯하여 약 40여 가구의 주민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아직도 주거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농사가 가능했던 것은 이 지역이 재약산 수미봉 유역의 남동쪽 집수구역에 위치하여 우수를 통해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문 특성에 의하여 현재 다양한 습지 식생이 분포하는 환경을 이루고 있다.
습지보호지역 중심부에 고산습지의 지표식물군락인 진퍼리새 군락과 오리나무-진퍼리새 군락이 분포한다.
멸종위기식물인 노랑무늬붓꽃을 비롯하여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꽃창포, 등칡, 천마 등 다양한 식물들이 자생한다.
삵과 하늘다름쥐 등 멸종위기동물과 천연기념물인 매, 원앙, 소쩍새가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생물 다양성과 생태교육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습지보호지역 및 그 주변에 분포하는 참억새 군락은 광활한 면적과 계절에 따른 변화가 아름다워 감상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주변에는 밀양의 대표적인 사찰인 표충사가 있으며, 풍혈에 의해 생성된 얼음골 지형이 있다.
또한 인근에 ‘사자평’으로 불리는 해발 750~900m의 고위평탄면은 경관이 수려하다. 따라서 관광객과 등산객의 출입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주변 환경은 습지 주변의 사면침식과 토양유실을 일으켜 습지의 육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 사람
사람은 사람이고 싶다
사람은 그립게 살고 싶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
사람은 믿으면서 살고 싶다
사람은 더불어서 살고 싶다
사람은 사랑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베풀면서 살고 싶다
사람은 아름답게 살고 싶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사람은 자비와 지혜로 살고 싶다
사람은 따뜻한 가슴으로 살고 싶다
사람은 배려하고 화해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이고 싶다
사람은 모두가 똑같은 사람으로 알고 싶다
사람은 사랑과 동정을 구분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그저 내 사람이거니 하고 살고 싶다
사람은 화 낼 줄도 알고 울 줄도 알고 싶다
사람은 끝없는 의문 속에 존재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있는 대로 보고 보이는 대로 살고 싶다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주고 싶다
20001212(陰1116) TUE
Mundy Sung
■ 꽃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당신의 마음이다
꽃 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희망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20051212 MON
Mundy Sung
■ 人生(인생)
人生(인생)에 있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神(신)의 축복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마음이 가는대로 잘 생각하고 판단해서 몸이 움직이는 대로 行動(행동)하고 실천하라!
그리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할 것이다.
歲月(세월)은 마냥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은 人生(인생)에서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같은 하늘아래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感謝(감사)해야 할 것이다.
20141104 TUE
Mundy Sung
■ 20221202 FRI 大韓佛敎 曹溪宗 載藥山 表忠寺(Pyochung Temple)
■ 國際(世界) 佛敎旗 와 WFB
國際(世界)佛敎旗(국제 불교기)는 불교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국제 불교기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파랑, 노랑, 빨강, 흰색, 주황색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오른쪽 열에는 5개색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줄무늬로 되어 있다.
색은 각각 의미가 담겨있다.
불교기는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세계 불교도 우의회(世界 佛敎徒 友誼會)'에서 만국공동의 불교기로 정식 승인되었으며, 현재 세계 불교국가의 불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원래 불교기는 1882년 영국인 불교도이면서 미국 국적을 가진 올코트(Colonel Henry Stell Olcott)대위가 창안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시에 성체에서 육종의 색광이 방출되는 것을 근거하여 일면육색기(一面六色旗) 를 설계하였다고 한다.
불교기의 5색의 가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5색(청.황.적.백.주)의 세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 불멸하다는 뜻을 상징 한다.
불교기에 사용한 색깔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청색 :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구하며 살아가는 힘을 의미하므로 정근과 지혜를 뜻한다.
- 황색 : 찬란한 부처님 몸의 빛과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하며 금강의 지혜를 뜻한다.
- 적색 : 대자대비한 법을 닦아 항상 쉬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자비와 정진을 뜻한다.
- 백색 : 깨끗한 마음으로 온갖 악업과 번뇌를 없앤 청정의 지혜를 의미한다.
- 주황 : 수치스러움과 그릇된 길로의 꾀임에 잘 견디어 내는 인욕의 지혜를 뜻한다.
■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는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 단체이다.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본부는 태국에 있으며, 역대 회장은 모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배출되는 등 상좌부불교(테라와다불교)가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가 WFB에서 활동중이다.
미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 등 35개국에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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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도우의회의 역대 회장
현재 회장은 태국의 en:Phan Wannamethee이다.
1950년 - 1958년 : Dr. G.P. Malalasekera, 스리랑카
1958년 - 1961년 : Hon. U. Chan Htoon, 미얀마
1963년 - 1984년 : H.S.H. Princess Poon Pismai Diskul, 태국
1985년 - 1998년 : Prof. Sanya Dharmasakti, 태국
1999년 - 현재 : H.E. Phan Wannamethee, 태국
■ 국제 불교기(Flag of Buddhism-國際 佛敎旗)
■ 표충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국보 제75호)
표충사에 있는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향완.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27.5㎝, 입지름 26.1㎝.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된 불교공예품의 하나로 명문이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형태는 넓은 전이 달린 완형의 몸체에 나팔형의 받침을 갖춘 고배형이다.
향완 전체에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넓은 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범자가 새겨진 6개의 원이 있고 그 사이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체에는 역시 범자가 새겨진 4개의 원이 있으며 턱이 있는 밑부분에는 굵은 윤곽선 안에 가는 평행선으로 표현된 중판 앙련이 입사되어 있다.
받침에는 운룡무늬[雲龍紋]가 회화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넓은 전의 뒷면에 새겨진 57자의 명문에 의해 1177년(명종 7)에 만든 것으로 용흥사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향완은 비례가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이용하여 문양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은입사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 보물 제279호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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