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12:23ㆍ■ 건축 인테리어
햇빛이 비치면, 그 건물은 스스로 선글라스를 쓴다
남극해에 많이 서식하는 갑각류인 ‘크릴’이 어둠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몸통 색깔 바꾸는 크릴에서 착안
플라스틱 두 겹 사이 ‘광유’ 넣어
차양막 대신할 자동 시스템 구성
낮에 어두워지며 온도 상승 차단
기존 기술보다 에너지 30% 절감
‘난바다곤쟁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해양 생물이 있다. 희귀종 같지만 ‘크릴’이라고 부르는, 전 세계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형 갑각류이다. 특히 남극해에선 고래와 펭귄의 주된 먹이다. 성체의 몸 길이는 5㎝가량 된다. 크릴은 사람들 사이에선 ‘크릴새우’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크릴은 새우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동물이지만, 외모가 비슷해 그렇게 부른다.
크릴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주변 밝기에 따라 몸통의 투명도를 조절하는 능력이다. 어두운 곳에선 내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몸통을 맑게 유지한다. 그러다 밝은 곳에선 몸통 색깔을 어둡게 바꾼다. 태양광이 비치는 곳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내부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캐나다 연구진이 이런 크릴의 신체적인 특징에 착안해 건물 창문 스스로 투명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창문 내부에 ‘광유’, 즉 석유 등 광물에서 유래한 기름을 극소량 주입해 창문을 밝게 또는 어둡게 통제하는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다.
이 기술을 쓴 창문은 밝은 낮에는 알아서 까매지고, 저녁이 되면 맑은 창문으로 변신한다. 사람이 일일이 블라인드를 치거나 걷지 않아도 된다. 냉난방비와 조명 비용을 아끼고, 건물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만드는 기술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캐나다 연구진이 만든 신형 창문에 햇빛이 비치자 작았던 검은 꽃무늬(위쪽 사진)가 1~2초 만에 큰 꽃무늬로 바뀌었다. 맑은 물에 잉크가 번지듯 검은 무늬가 확대돼 창문에서 신속하게 차광 효과를 낼 수 있다. 토론토대 연구진 제공
■ 크릴 새우 생체기능 응용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진은 최근 크릴에서 영감을 얻어 창문의 투명도를 통제하는 새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최근호에 실렸다.
연구진이 이 기술을 개발한 계기는 현재의 창문이 기본적으로 ‘정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태양 광선이 창문을 관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맑은 날씨에는 건물 내부 기온이 속절없이 오른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또는 밤이 되면 내부 기온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블라인드를 치거나 걷는 방법도 있지만 일일이 햇빛 상황을 판단해 조작하는 일은 번거롭다. 창문이 많은 건물에 강력한 냉난방 기기가 필요한 이유다.
연구진은 크릴에 주목했다. 크릴의 신체에는 일종의 ‘자동 음영 변경 시스템’이 있다. 자신의 몸을 밝은 낮에는 불투명하게, 어두운 밤에는 투명하게 바꾼다. 자외선의 독성으로부터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생체 작용이다. 피부에 색소를 넣었다 빼냈다 하는 식이다.
연구진은 건물의 창문에 크릴의 음영 시스템을 공학적으로 구현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두 장 안에 ‘광유’를 소량 집어넣었다. 두께 1㎜로 유지되는 광유는 석유와 같은 광물에서 나오는 기름을 통칭한다. 그리고 광유에 소량의 물을 상황에 따라 넣었다 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성했다. 물이 많아지면 창문은 어두워지고, 반대로 적어지면 투명해진다.
■ 건물 에너지 비용 30% 절감
연구진이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공개한 이 기술의 모습은 흥미롭다. 빛을 만난 창문에선 검은색 꽃이 피는 것처럼 어두운 무늬가 빠르게 확대된다. 골프공보다 작던 검은 무늬가 불과 몇 초 만에 테니스공보다 커진다.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영상을 고속으로 재생한 것 같은 모습이다. 무늬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꽃은 물론 동그라미, 눈 결정 형태도 가능하다. 게다가 같은 창문 안에서도 한 귀퉁이는 아주 어둡게, 다른 귀퉁이는 덜 어둡게 만들 수 있다. 이른바 ‘그라데이션’을 창문에 구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물 내부의 온도 변화를 최소화해 유지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외부 온도가 건물 내부로 스며드는 일을 막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현재 시중에 나온 ‘전기 변색 유리’, 즉 전력을 통해 투명도를 바꿀 수 있는 유리 기술과 비교할 때 “냉난방과 조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최대 30% 더 절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에너지를 생산할 때 배출되는 탄소를 줄여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연구를 주도한 라파엘 케이 토론토대 재료공학과 연구원은 “건물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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