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2022. 8. 14. 04:14■ 大韓民國/지리 지질 역사

 

단종,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 Daum 백과

 

단종,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아버지 묘인 현릉을 다녀오다 살곶이벌에서 숙부 세조의 마중을 받는다. 이미 4개월 전에 왕위를 물려준 덕분에 분에 넘치는 환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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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영원히 돌아올  없는 다리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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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아버지 묘인 현릉을 다녀오다 살곶이벌에서 숙부 세조의 마중을 받는다. 이미 4개월 전에 왕위를 물려준 덕분에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몰려오는 먹구름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년 뒤인 1457년(세조 3년) 6월 21일, 창덕궁을 나온 단종은 이제 말을 탄 어엿한 청년 군주의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쫓겨나는 비운의 군주로, 아니 폐주의 신분으로 동대문 밖을 나서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미 성 밖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단종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아내인 폐비 정순왕후 송씨와도 이별했다. 두 사람이 이별한 다리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로 불렸지만,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영원히 건너간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이다.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새롭게 세운 영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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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단종은 세종이 종종 찾아 휴식을 취했다는 1백 칸짜리 화양정(華陽亭)이라는 정자에서 유배 길의 첫날 밤을 지낸다. 화양정이라는 이름은 정자를 지은 세종이 목초지에서 떼 지어 되돌아오는 말들의 모습을 보고 《주서(周書)》의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이란 구절에 있는 화자와 양자를 따서 붙인 것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억조창생을 다스리는 군왕의 몸이 아니라 누명을 쓴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 길에 오른 단종은 그날 한양 땅에 다시 돌아오기 바란다는 뜻에서 이 화양정을 회행정(回行亭)이라고 고쳐 지었다. 그 후 사람들은 화양정을 회행정이라고 불렀으나 단종이 유배 길에 올랐던 그해를 다 넘기지 못하고 사사되자 다시 화양정이라고 불렀고, 그 일대를 화양동이라 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단종은 광나루에서 배에 오르기 전 세조의 명의 받은 환관 안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삼문의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다." 1457년 6월 22일 《세조실록》의 기록이다. 하지만 환관 안노가 세조에게 억지로 지어낸 말을 했거나 아니면 사관이 거짓으로 기록한 것일지도 모른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데다 한양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던 청년 군주가 자존심도 없이 자신의 복권을 위해 반정을 기도했던 충신에게 고작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폐주의 신분이 된 청년 군주는 그저 말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광나루에 정박해 있던 영월 가는 배 앞에서 한양의 풍경을 다시 한 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청년 군주를 보내는 환송객들도 머지않아 다시 한양 땅을 밟을 것이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 폐주는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화양동 느티나무

느티나무가 서있는 자리에는 화양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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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뒤 말을 탄 금부도사가 폐주 앞에 나타났다. 청년 군주는 자신의 해금 소식을 알리려고 달려온 관리인 줄 알고 버선발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사약이 들려 있었다. 죽음의 약사발을 앞에 둔 단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 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하늘은 귀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이 시는 <자규시(子規詩)>다. 궁중에서 나온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 자신이 바로 그 두견새다. 인정 많은 조선의 백성은 쫓겨난 임금의 시를 노래로 불렀다. 끝까지 사약을 거부하던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목이 졸려 죽었으니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조에 그날의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청년 군주의 나이 17세. 한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으니 어린 조카를 위해 보위를 물려받았다는 세조의 강변은 거짓이다. 굳이 정사를 멀리하고 야사를 인용해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당시 정사가 야사보다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노산군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자결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도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조선 시대의 야사총서(野史叢書). 59권 42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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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김용관 |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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