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탈옥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버린 소녀

2020. 11. 19. 12:15■ 문화 예술/영화 이야기

오빠의 탈옥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버린 소녀

장혜령 입력 2020.11.1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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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안티고네> , 그리스 신화의 도발적인 재해석

[장혜령 기자]

 

 
  영화 <안티고네>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내 심장이 시키는 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영화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이민자 문제로 변주했다. 안티고네는 희생과 비극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단순히, 그리스 신화의 재해석을 떠나 가족을 위해 용기를 낸 여성의 단단함과 끈끈한 유대관계가 깊게 관여되어 있는 작품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소녀의 삶이 가혹하다 못해 처절하다.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케 하는 복선이 종종 교차된다.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희곡이며 <오이디푸스 왕>과 연결성을 갖는다. 안티고네는 아내이자 왕비인 이오카스테가 어머니임을 알고 두 눈을 뽑아 비극을 맞은 오이디푸스 왕의 딸이다. 훗날 전쟁터에서 오빠 폴리네이케스가 역적으로 돌아오자, 시체 매장을 금지한 숙부 크레온 왕의 말을 어기고 장례를 치러주다 사형당했다. 따라서 안티고네는 가족애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계명을 어긴 인물로 비유된다. 안티고네의 '안티(anti-)라는 접두사는 어떤 일에 반대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며 '꺾이지 않는', '거슬러 걷는 자'란 뜻을 갖는다.
  

 
  영화 <안티고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캐나다에 정착한 이민자 가족을 비추며 21세기 안티고네(나에마 리치)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범생인 안티고네는 별안간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큰오빠 에테오클레스(하킴 브라히미)를 지키다 수감된 둘째 오빠 폴리네이케스(라와드 엘-제인) 마저 잃을 수 없었다. 힘들게 캐나다로 왔지만 시민권을 얻지 못해 본국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것. 전과가 없는 미성년 안티고네는 면회를 가장해 오빠와 옷을 바꿔 입고 탈옥을 돕는다. 이는 금방 들통 나고 재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오빠들의 실체는 안티고네의 희생을 의미 없이 만들기에 충분했다. 항상 다정하던 오빠는 경찰의 과잉대응에 저항한 완전무결 희생자가 아니었다. 안티고네는 잠시 흔들리지만 결코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연로한 할머니(라치다 오사사다) 대신 가장으로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자 정체성의 일부로 해석된다. 어려움을 함께한 가족이야말로 종교 이상의 가치로 환원된다. 경찰이 안티고네에게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부모님이 없어, 손잡아 줄 수 없는 어린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라고 말이다. 비록 허물이 있다고 해도 가족이기 때문에 지켜주어야 한다는 안티고네의 발언은 내내 심장을 움켜쥐고 놔주지 않는다. 

한편, 유죄 판결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안티고네는 국선 변호사를 만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재판을 선전 도구로 이용해 판도를 바꿔 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남자친구 하이몬(앙투안느 데로쉬에)의 적극적인 SNS와 캠페인 활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SNS 영웅으로 거듭난다. 안티고네라는 이름은 이주민, 난민, 불법체류자, 디아스포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저항의 상징이 된다.
  

 
  영화 <안티고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안티고네>가 전하는 2500년 전 신화는 캐나다 사회를 떠나 전 세계적인 파장이 된다. 영화는 어린 소녀에게 잔인하게 묻는다. 가족을 위한 희생과, 시민권을 두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하고서 침착하고 잔잔하게 대처했던 안티고네가 법정에서 폭발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캐나다 출신의 신예 감독이자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신화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살렸다. 다문화의 포용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국가폭력의 실태, 윤리와 법, 선과 악, 내면의 갈등을 도발적인 발상으로 접근했다.

SNS를 통해 쉽게 영웅과 범죄자로 왜곡될 수 있는 허와 실을 손바닥 뒤집기처럼 이용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 편집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한껏 무거워진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티고네 원형이 새롭게 재현된 영화다. 안티고네를 맡은 '나에마 리치'의 연기가 신입답지 않는 농후함으로 오랜 잔상을 남긴다. 슬픔, 기쁨, 연약함, 강인함, 분노, 상실, 연민을 품은 얼굴로 영화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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