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마을 지키는 神들이 모여 사는 '비밀의 숲'

2020. 10. 26. 10:06■ 여행/국내 여행지 소개

[원주] 마을 지키는 神들이 모여 사는 '비밀의 숲'

권오균 입력 2020.10.26. 04:09

 

매주 토요일 단 40명에게만 허락된 원주 성황림
1년에 2번 성황제 지내는 신령한 숲
1962년 천연기념물 93호로 지정
서낭당 좌우 높게 솟은 음나무·전나무
마을곳곳 길흉화복 두루 살펴
숲 좋아서 귀향한 이장님이 길잡이
치악산 붉은 단풍에 벌써 마음 들썩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있는 성황림은 우리 민족 수목신앙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단풍이 들면 붉은 자태를 뽐내는 치악산 자락에 있어 방문하기 좋은 시기다.

슬슬 날씨가 싸늘해지는데 운동량이 줄어 걱정이다. 더욱이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야외 활동이 부족했다. 이러다간 '최고의 재테크'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오겠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로수가 하나둘씩 붉게 노랗게 가을 색을 입고 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최소화하되 상쾌한 공기를 흡입하러 떠났다. 목적지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황림이다. 가을이면 '악' 하고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운 치악산 자락에 있다. 붉은 단풍이 빼어나 택리지 등 일부에서는 치악산을 '붉을 적' 자를 써 적(赤)악산으로 기록했을 정도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을 내달렸다. 입구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한 이는 성남2리 이장이자 자칭 '세계 최고 숲 해설가' 고계환 선생님이었다.

성황림은 1962년 6만3877㎡ 규모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 93호로 지정됐다. 광복 이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보물고적명승 93호로 지정했다. 성황림 입구에 설치된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두 개뿐이다. 하나는 마을에서 가지고 있다. 나머지 하나를 두고 국립공원공단과 문화재청이 서로 가져가겠다고 티격태격했다며 고계환 해설사가 은근히 자랑했다. 고 해설사는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부산으로 대학을 가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었다. 주말마다 고향을 찾아 숲을 기록하고 아이들에게 나무 이야기를 들려줬다. 관련 서적을 고주환이라는 필명으로 3권이나 집필하더니 연어처럼 고향에 돌아와 이장을 맡고 숲 해설사를 자처했다.

고 해설사는 입구에서 숲 관람객 일행에게 주의 사항을 당부하고 진드기 기피제를 바지와 신발에 뿌려줬다. "성황림은 온대 활엽수림의 보고입니다. 50여 종이 다양한 층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어요. 그런데 뱀과 벌이 있어요. 사고가 난 일은 없지만, 뱀은 맹독을 품고 있어서 안전요원이 먼저 길을 확보한 이후에 이동할 거예요. 길이 아닌 풀섶(풀숲의 방언)으로는 가지 말아 주세요."

문을 열고 숲길에 들어서자 소리부터 달라졌다. 국도변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음은 사라지고 어림잡아 대여섯 종류가 넘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고 해설사는 딱따구리, 동고비 등이 서식하고 철새인 뻐꾸기도 찾아온다고 했다.

들어가고 몇 걸음 떼지 않아 서낭당에 도착했다. 서낭신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내부에는 신목을 향한 제단만 놓여 있다. 서낭당 오른쪽에 곧게 솟은 전나무가 서낭당 주인이고, 왼쪽 음나무가 안주인이다. 전나무는 성황림 숲에서 유일한 침엽수다. 높이 29m 지점에서 윗부분이 똑 부러졌다. 그 위로 35m 높이까지 나무가 뾰족하게 뻗어 있다. 둘레는 성인 남성 세 명이 달라붙어 손을 맞잡아야 겨우 닿을 정도로 거대하다. 가슴높이지름은 1.3m다. 전나무는 남성과 양의 기운을, 음나무는 여성과 음의 기운을 담당한다. 이 둘이 조화를 이뤄 나무 신의 숲을 지키고 인간이 사는 마을의 길흉화복도 보살핀다.

서낭당과 전나무·음나무 주변으로 복자기나무 수십 그루가 호위하듯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금줄이 쳐져 있다. 고 해설사 안내를 받아 종이에 소원을 적어 금줄에 매달았다. 각자 '만사형통' '우리 가족 건강' '장가갑시다' 등을 정성스럽게 적었다. 일행 중에는 딸아이의 흔한 이름을 신이 혼동할까 염려해 괄호 안에 생년월일까지 친절하게 적는 이도 있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해오던 일이다. 해마다 4월 초파일과 음력 9월 9일 밤 열두 시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돌계단 위에 세운 당집의 오른편 전나무에 제를 올리고, 왼편 엄나무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워 올렸다.

서낭당 오른편에 있는 신목 전나무를 성인 남성 둘이 안고 있다. 셋은 둘러서야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서낭당 왼쪽은 신의 숲이고, 오른쪽은 인간의 숲이다. 신의 숲을 지나 인간의 숲으로 향하는 길에 고 해설사는 궁예와 마을 간 인연을 소개했다. 삼국사기는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한 궁예가 892년 치악산 기슭 석남사를 중심으로 주천, 영월, 울진으로 정복지를 확장했다고 기록한다. 이 석남사가 신림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이름도 '석남'에서 '성남'으로 무뎌져 지금 마을 이름이 성남리가 됐다고 성남리 사람들은 믿는다. 궁예가 삼국 통일을 위한 출정에 나서면서 서낭당 앞을 지나갔다는 설도 전해진다. 고 해설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쪽 눈이 없던 궁예를 떠올리며 눈을 감고 앞사람 옷자락을 잡고 앞사람 설명에 의지해 걸어보자는 말이었다. "바닥에 나무뿌리" "오른쪽으로 돌아요" 그냥 걸어가면 한달음인 길은 긴장과 고요가 흐르는 조심스러운 기차놀이가 됐다. 어느 순간 턱을 넘어 신의 숲에서 인간의 숲으로 건너왔다. 앞사람에게 들은 "자,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뒷사람에게 해주고 눈을 떴다. 마음을 꿰뚫는 궁예의 관심법은 터득하지 못했으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사에 대해 잠시 고찰했다.

이후 고 해설사는 '멍 때리기' 체험을 제시했다. 돗자리를 깔고 등을 맞대고 누워 5분간 눈을 감아봤다. 누군가 침묵을 깼다. "등이 생각보다 따뜻하네." 고 해설사는 이 말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 잠시라도 멍 때려본 적 있나요? 아무 생각 말고 머리를 비워보세요." 그의 말을 듣고서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잠시나마 새소리와 나무 소리로 이뤄진 숲 소리와 숲의 향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작년까지 상황림은 성황제를 지내는 딱 이틀만 일반에 숲을 개방했다. 올해 6월부터는 토요일에 사전 신청한 20명씩 단체 관람으로 두 차례 관람할 수 있다. 이번주는 단풍이 절정이다. 서낭당 주변 복자기나무에서 헬리콥터 날개가 돌듯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은 고 해설사가 꼽는 '단풍의 여왕' 치악산의 백미다. 숲 해설과 함께 마을에 방문해 떡방아를 찧어 떡을 만드는 떡메 체험도 할 수 있다. 가격은 1인당 1만2000원이고 2시간가량 걸린다.

[원주 = 권오균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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