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6. 07:19ㆍ■ 大韓民國/문화재 사랑
청동기에 새겨진 고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입력 2019.12.06. 05:06 수정 2019.12.06. 07:06
부여 수도였던 지린시에서도 광대뼈 얼굴 출토..조상 외모 미화 반성해야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⑯고조선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조상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세계사의 첫 페이지는 돌도끼를 든 무식한 원시인이 장식하지만, 자기 나라의 역사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시작한다.
고대 사람들도 자신들은 신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은 중국의 산해경에 나오는 것처럼 괴수나 짐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조선을 설명할 때는 산신령 같은 모습의 단군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는 근대에 만들어낸 상상도일 뿐이다.
진짜 고조선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최근 중국 랴오닝 지역에서는 고조선 사람의 얼굴로 추정되는 자료가 나왔다. 광대뼈가 나오고 작은 눈에 상투를 튼 모습은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위만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고조선의 얼굴이 새겨진 유물은 벽화나 예술품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의 상징이었던 청동기의 거푸집이었다. 청동을 만드는 기술자, 그리고 그들이 만든 청동기를 무기로 사용한 전사와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이 있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우리 조상의 모습은 기대와 달리 너무나 평범하다. 어쩌면 당연하다.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만든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상투 틀고 고조선으로 넘어온 위만
고조선 사람들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 있다. 한나라 제후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이 고조선으로 투항할 때의 기록이다. 노관은 한나라 개국공신으로 한고조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같은 날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한자성어처럼 한나라 통일 이후 한고조는 가신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노관도 흉노로 도망쳤다. 이에 그의 부장이었던 위만은 ‘상투를 튼 머리에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조선으로 귀순해서 장군이 되었다. 이후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규합한 위만은 쿠데타를 일으켜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연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고조선 왕이 됐던 위만의 경력 때문에 한동안 위만의 국적을 두고 중국설과 고조선설이 대립했었다. 물론, 당시는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 ‘중국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니 연나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데, 현재 베이징 일대에 있었던 연나라에는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살았다. 심지어는 중앙아시아 유럽계 사람들도 살던 곳이니 혈연적인 계통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 위만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의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이었다. 문맥상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은 곧 고조선의 풍습이라는 설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상투머리가 중국 서남지역 윈난의 풍습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물론, 연나라 장수를 지낸 위만이 고조선으로 오면서 엉뚱하게 윈난 지역의 상투를 틀 리는 없다. 이렇듯 고조선의 얼굴에 대한 실물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난무하던 차에 드디어 상투머리를 튼 고조선의 얼굴이 발굴되었다.
청동기 만들던 기술자의 초상화
1990년 고조선과 고인돌의 중심지였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타완촌이라는 곳에서 농민이 밭을 갈다가 파괴된 옛 무덤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여러 청동기와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을 발견했다. 무덤에서 청동기와 함께 거푸집이 발견되는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청동기 제련 기술을 독점했던 높은 계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동기는 무기와 제사에 필요한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기술 복합체의 결과물이었다. 타완촌 발견 이전에도 고조선과 한반도의 세형동검을 사용한 삼한 지역의 옛 무덤에서 거푸집은 자주 발견되었다. 청동 기술은 바로 그들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했다.
그런데 타완촌에서 출토된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작은 도끼 거푸집에는 이제까지 발견된 거푸집과는 달리 놀라운 코드가 숨어 있었다. 바로 거푸집 뒷면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상투를 튼 2명의 얼굴이다. 그 얼굴 형태를 보면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상투를 틀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는 낮고 눈이 작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의 초상화 같은 뭔가 근사한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푸집에 새겨진 고조선 인물상은 예사롭지 않다. 돌로 만든 거푸집에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을 다 파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거친 것이다. 이 거푸집 인물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청동 제련 기술을 관장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나 신을 섬기고 청동을 주조하는 의식에 사용한 것이다. 살아생전에 청동을 주조하던 사람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그 주인공이 죽자 무덤에 같이 묻은 것이다.
타완촌 유적과 멀지 않은 선양시에는 대표적인 고조선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정가와자)가 있는데,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 유물은 타완촌 유물과 거의 똑같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그 연대를 대체로 약 2500년 전으로 본다. 타완촌 유물은 1990년대에 발견됐지만 20여년간 유물 창고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2010년 새로 개관한 랴오양시 박물관의 진열실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조선이 세력을 키워가던 기원전 6세기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진열실에는 고조선이라는 설명은 전혀 없이, 전쟁을 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타완촌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은 내몽고 츠펑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츠펑 지역은 동아시아로 들어온 초원의 청동기가 전해진 교차로로 꼽힌다. 고조선은 당시 첨단 기술을 받아들여서 무기를 만들고 국가를 이루었음이 그들이 남긴 인물상으로도 증명된다. 그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무기를 소지한 전사 집단, 그리고 청동거울로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이 있었으니, 상투머리의 이 인물은 바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투 튼 머리, 부여로 이어지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상투를 튼 사람의 모습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송화강 유역에서 나라를 건국한 부여인의 얼굴에서도 보인다. 부여의 수도였던 지린성 지린시의 마오얼산과 둥퇀산 출토의 인면상은 이빨을 드러낸 다소 험악한 모습이지만,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지금의 만주와 극동 일대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소 험상궂고 무서운 얼굴인 것은 아마도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한 벽사(辟邪)의 의미인 것 같다.
고조선의 청동 기술은 남쪽으로 전해져 남한에서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청동기들이 종종 발견된다. 전북 완주 상림리와 경북 청도 예전동 등 청동기 유적들에서는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는 동검들이 한데 묶여서 발견된 적이 있다.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묻은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상투머리를 한 고조선인은 바로 청동기 주조 기술을 보유하고 고조선은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주던, 당시 사회를 선도하던 테크노크라트였던 셈이다.
타완촌에서 시작해서 부여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특징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순할 때 상투를 질끈 매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고조선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조상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자기들의 소망을 조상들의 모습을 변형시켜서 표현했다. 그런 외모에 대한 집착은 20세기에 절정을 이루어서 키, 외모, 머리 색깔로 인종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심지어 죄 없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이기까지 했다. 바로 외모의 특징으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광고했던 나치들의 이야기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인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들은 사진을 조작해서라도 자신들의 외모가 유럽과 비슷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일본인의 조상은 유럽인이라는 주장을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한국과 중국을 차별하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도 우리의 조상을 지나치게 미화해서 표현해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고학은 언제나 우리의 조상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증명할 뿐이다.
문명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데 필요한 관건은 외모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었다. 소박해 보이는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얼굴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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