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일하는 여자는 바지가 필요해, 여왕이라도
게다가 엘사는 의상까지 새로 선보였다. 1편에서 ‘렛 잇 고’를 부를 땐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로열 웨딩 베일을 연상시키는 길다란 은빛 망토로 신비한 여왕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번엔 푸르스름한 은빛은 그대로지만 발목 위로 짤막해진 방한용 망토를 둘렀다. 특히 ‘사소한 발견’에겐 북쪽 탐험에 나선 엘사가 집채만한 파도에 뛰어들기 직전 망토를 벗었을 때 화면 포커스가 흥미로왔다. 살랑거리는 원피스 아래 발목까지 덮는 ‘레깅스’를 또렷이 보여준다. 엘사는 그 차림으로 절벽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물의 말(water horse)’도 탄다. 한마디로 ‘일’을 한다.
"엘사가 위험에 맞설 실용적인 옷"
최근 ‘겨울왕국 2’ 홍보를 위해 내한했던 크리스 벅, 제니퍼 리 감독 등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비주얼 아티스트 브리트니 리 역시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인을 할 땐 모두 (캐릭터 작업과) 함께 이뤄졌다. ‘이걸 입을까 말까’ 질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때 이 순간 소녀라면 어떤 게 맞지?’ 하는 식이었다.”
1993년에야 미 상원 '여성 바지' 허용
최근 허핑턴포스트가 인용한 뉴욕 패션기술대학교의 박물관 코스튬 큐레이터 엠마 매클렌던의 말이다. 요즘 여성 바지 정장의 선구자였던 ‘파워 슈트’가 이즈음 등장했다. 불과 50~60년 전까지 '바지 입은 여자'가 서구에서도 일상적이지 않았단 얘기다.
여자 바지의 시작은 1850년대 ‘블루머’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블루머(bloomers)란 무릎 위나 아래 길이의 품이 넓은 바지에 고무줄을 넣어 잡아매도록 한, 요즘의 ‘몸빼 바지’ 비슷한 모양새다. 1851년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라는 여성이 ‘터키 드레스’ 즉 통 넓은 하렘 팬츠를 본떠 제안했다. 같은 해 여성인권 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이 제안대로 바지를 만든 뒤 이를 본인이 발행하는 잡지를 통해 널리 알렸다. ‘블루머’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다.
'코르셋' 벗고 스포츠용 바지 입기 시작
“옷은 처음에 기능미로 출발했다가 장식미로 진화한다. 예전엔 여자의 바지란 게 특별한 직업을 가졌을 때, 예컨대 경찰관 제복 같은 개념이었다면 요즘은 퍼스트레이디도 치마 대신 바지를 즐겨 입는다. 패션 아이템으로서 치마‧바지 구분보다 어떤 게 그 활동과 멋에 맞는가를 따질 뿐이다.”
패션디자이너 간호섭 홍익대 교수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도 요즘 패션 비즈니스 때 “치마는 전혀 안 팔리고 바지만 팔린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예전엔 치마 밑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 개념이었던 레깅스가 이젠 버젓이 바지처럼 ‘일상 룩’이 돼간다. 운동복과 일상복의 경계를 허문 애슬레저룩에서 레깅스는 대표주자로 꼽힌다. 미국의 2017년 레깅스 수입량은 2억 장을 넘겨 사상 처음으로 청바지 수입량을 제쳤다고 한다. '레깅스 시구'로 삽시간에 스타가 되는 일도 "옛날엔 별일이 다 있었네"가 될지 모른다.
“나도 엘사처럼 입고 싶어!” '겨울왕국2'를 보고 난 딸아이가 이렇게 조를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게 이번엔 엘사가 드레스 밑에 레깅스를 입었다. 한층 안전하고 편안하게 구르고 뛸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알려주자. 현대의 공주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일’을 한다.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고 지키고, 때로는 적들과 싸우고 협력하기 위해 엘사도 바지 차림으로 뛰고 달린다. 지난해 미국 여성복 상점 앤 테일러는 '바지는 힘(권력)이다(Pants Are Power)'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엘사처럼, 딸들아 힘내라.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소한 발견(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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