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아직도 우거지 해장국 3000원 '종로3가'

2024. 1. 19. 11:50■ 인생/초고령화 사회

1만원으로 점심 한 끼 해결하기도 어려운데…종로3가 상권, 3~4000원 유지 '어르신들의 성지'
"1만원이면 이발하고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까지 먹고도 돈 남는 동네…든든하게 한끼 해결"
송해집 사장 "조금 먹고 조금 버는 것…아직도 이렇게 싸게 받느냐고 말해주시는 분들 많아"
상인들도 고령화되면서 언제까지 현재 상권 유지될 지 알 수 없어 "20년 쯤 뒤면 다 없어질 것"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송해집. 우거지 해장국 한 그릇 가격이 3000원이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서울 시내 웬만한 곳에서는 1만원으로 점심 한 끼 해결하기 어려운 '런치플레이션(런치+인플레이션)' 시대지만, 서울 종로3가 상권은 시간이 멈춘 듯 여전히 저렴한 물가를 유지하며 특히,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어르신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 상권은 탑골공원 담벼락을 따라 싼 가격의 음식점, 이발소, 전통찻집, 실버영화관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지갑이 얇은 '어르신들의 성지'로 통하고 있다. 어르신들은 "1만원이면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까지 마시고도 돈이 남는 동네가 바로 이 곳"이라고 강조한다.

 

18일 데일리안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 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50m 정도 떨어진 한 국밥집을 찾았다. '국민MC' 고(故) 송해 선생이 생전 자주 왔다고 해서 인근에서는 '송해집'으로 통하는 이 식당은 치솟는 외식 물가에도 우거지 해장국 한 그릇을 3000원에 내놓고 있다. 이것도 지난해 7월 500원이 오른 가격이다. 좌석이 넉넉하지 않아 혼자 온 사람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낯선 사람과 합석을 하고 있었다. "여기 국밥하고 계란후라이 2개요~"라는 주문이 쉴새 없이 들려왔다.

15년째 이 가게 단골이라는 한모(80) 어르신은 "요즘 점심 한 끼를 이렇게 저렴하게 먹기 어려운데 맛까지 좋아 주중에는 5일 내내 출근부를 찍는다"며 "계란후라이도 2개에 2000원이라 이 곳 만한 데가 없다"고 웃어보였다.

종로구 낙원동 한 식당. 순두부, 콩나물, 선지해장국 한 그릇 가격이 모두 4000원이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종로3가까지 무료 지하철을 타고 온 정모(85) 어르신은 "아침은 집에서 간단하게 두유와 삶은 계란을 먹고 운동할 겸 해서 점심으로 3000원짜리 해장국을 먹으러 왔다"며 "가격 부담이 없이 한 끼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모(75)씨는 "해장국이 2500원 할 때는 추어까지 넣어줬는데 500원이 오르면서도 질이 다소 떨어져 아쉽다"면서도 "막걸리 한 잔이 2000원이라 반주하기 좋다"고 전했다.

'순두부, 콩나물, 선지해장국 4000원'을 큼지막하게 써 붙인 이 식당은 부추전을 4000원, 도토리묵을 4000원, 소주를 3000원, 막걸리를 3000원에 판다. 23년 동안 식당을 운영해온 사장 박모(55)씨는 "처음엔 안주를 2000원에 판매를 시작했는데 몇년 전 3000원을 거쳐 올해부터 4000원이 됐다"며 "장사하면서 무슨 경영철학이 있겠나. 조금 먹고 조금 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이렇게 싸게 받느냐'라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며 "60대~90대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는데 대부분 반주 한잔 곁들여 식사하시고 이발까지 하러 가신다"고 덧붙였다.

종로구 낙원동 한 도너츠 가게. 도너츠를 1000원에 판매하고 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찹쌀 도너츠를 1000원에 팔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해 가게를 열었다는 박모(73)씨는 "1000원에 빵을 파니 이익 남는게 없어 고민하고 있다"며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싸게 팔려고 했는데 이익이 남아야 계속 할 것 아닌가"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박씨는 "1000원만 받아도 1개 100g으로 크게 만들고 있는데 크기라도 줄이려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근처에 도너츠 3개에 2000원 받는 곳도 있는데 실상 그곳 3개나 여기 1개나 무게가 같다"고 전했다.

종로3가 이발소들도 대부분 이발 6000원, 염색 6000원 시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강모(58)씨는 "바람도 쐬고 술 한 잔도 마실 겸 종로3가로 나왔다"며 "동네에서 머리를 자르면 1만2000원인데 이 곳에서는 염색하고 머리까지 다하는데도 1만2000원이었다. 친구랑 술을 먹기로 했는데 둘이서 양껏 술과 안주를 먹어도 3만5000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종로구 낙원동 일대 이발소. 이발비 시세가 6000원을 형성하고 있다.ⓒ데일리안 김하나 기자

 

동작구 노량진동에 거주하는 이모(72)씨는 "종로3가 상권이 인건비 때문에 이발비가 4000원에서 6000원으로 올랐지만 정성들여서 잘 깎아준다. 동네 미용실 가면 1만2000원은 내야 하는데 훨씬 싸다. 노량진 이발소들은 젊은이들 머리 스타일로 깎는데 종로3가 이발소들은 노인 스타일로 잘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 32만원은 며칠이면 금방 없어져 힘들다"며 "염색도 5000원이면 해서 여기서 하고 친구를 만나곤 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어르신들에게 칭송받고 각광받는 이 곳의 상권이 언제까지 유지될 지는 알 수 없다. 이 곳의 상인들 역시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50대 후반~60대 초반이면 '젊은 나이'라고 할 정도로 상인들도 고령화 돼 있다. 인천에서 매주 2~3회씩 지하철을 타고 종로 3가를 찾는다는 변모(75)씨는 "내가 가는 단골집 사장들도 다들 나처럼 나이가 들었다"며 "이어받아서 장사하려는 젊은이들이 없으면 20년 쯤 뒤에는 죄다 없어질 것 같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