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2023. 11. 20. 05:17■ 국제/러시아

 

“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사색(史色)] (daum.net)

 

“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사색(史色)]

[사색-47] 황후의 침실에서는 교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만족과 기쁨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지요. 거친 숨결이 넓은 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 중 하나인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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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죽이고 40살 연하와 잠자리”···색정광 ‘이 여인’ 역사를 바꾼 거물?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입력 2023. 11. 19. 06:21

 

[사색-47] 황후의 침실에서는 교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만족과 기쁨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지요. 거친 숨결이 넓은 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지요. 러시아 황실의 원자 생산을 위한 ‘애국적 성관계’였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황후의 잠자리를 달군 건 불륜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이라는 의존명사를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상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암시였습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잠자리를 중단한 그녀는 뭇 남성들과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성욕에 다소 무심해지는 환갑에도 40살 연하 미남을 침대로 끌어들였을 정도였습니다. 천하제일 색마 대회가 열렸다면, 능히 우승자는 그녀의 차지였을 것입니다.

예카테리나 젊은 시절. 1745년 작품. 프랑스 화가 루이스 카라바크 작품
바람만 피웠으면 다행입니다. 그녀는 황제였던 남편을 폐위시키기도 했었지요. 본인이 황제에 직접 올라 러시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인식구조로 이런 유형의 여성은 악처이자 혼군(昏君)이었을 게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 여성이 러시아에서 표트르 대제(46화 사색 참조) 다음으로 존경받는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예카테리나 대제(영어로는 카트린 대제)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죽인 것도 모자라, 수 없이 많은 잠자리 상대를 가진 ‘색정광’을 러시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카테리나, 그녀는 누구인가
예카테리나는 독일 안할부르크 지역 지배자이자 프로이센의 장군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의 딸로 1729년 태어났습니다. 당시 독일은 수 백개의 도시 국가로 찢어진 채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느슨한 조직에 가까웠습니다. 프로이센이 그나마 가장 큰 경쟁력을 보였던 왕국이었지요.

소규모 도시 국가 지배자들이 유럽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왕족과 혼맥으로 얽히는 것이지요. 예카테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귀족의 언어로 통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강도 높은 신부수업이었지요.

결혼 당시 예카테리나.
“꼭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하나요?”

가문에 빛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가 첫 만남을 하면서였습니다. 아우구스트는 어떻게든 딸을 그와 맺어주려고 애를 썼지요.

예카테리나는 나약하고 의지가 없는 표트르 3세에게 혐오의 감정을 내비쳤지만, 부모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러시아 최고 권력 엘리자베타 여왕 역시 예카테리나를 표트르 3세의 아내로 낙점지었지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1745년 두 사람이 결국 결혼식을 올렸지요. 예카테리나의 나이 고작 15살이었습니다.

“자자 사진 아니 그림 그릴 땐 웃읍시다.”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아직 러시아 황위에 오르기 전 모습이다.
“제가 러시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러시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독일 지방의 여성이 러시아 황실의 일원이 되는 건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고, 추운 날씨에 적응해야 했으며, 신교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잠도 못 잔 채 공부하고 러시아식 예의를 배우면서 폐렴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플 때, 가장 위로가 되어야 할 사람은 마땅히 배우자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표트르 3세는 다른 여자 치마 속에 있었지요. 예카테리나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까요.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저작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랬지만, 쉽진 않았습니다.

캐서린의 첫 애인 세르게이 살티코프.
그때 다가온 사람이 세르게이 살티코프였지요. 키 크고 잘생긴 백작 출신의 장교이자 시종실장. 왕족을 가까운 거리에서 호위하는 멋진 보디가드였던 셈이었지요. 외로운 그녀가 세르게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같은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예카테리나의 회고록을 보시지요. “내 첫 경험은 세르게이와 함께였다.”

오죽하면 러시아 내에서는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아들 파벨이 사실은 세르게이의 아들이라는 말까지 퍼졌을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파벨은 공식적인 아버지 표트르와 똑같이 생겼었지요. 작고 못생긴 모습 때문에 세르게이의 핏줄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러시아 황위 계승자 부부의 모습은 ’막장‘과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 그는 예카테리나 정책을 반대해왔다.
1762년, 1월 엘리자베타 여왕이 승하합니다. 표트르 3세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지요. 두 부부는 겨울 궁전에 입성하면서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백성들에게 선언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독일의 강대국인 프로이센과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습니다. 1761년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고, 러시아가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요. 당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끈 ’프리드리히 대제‘를 상대로 이룬 성과여서 의미는 배가 됐습니다.

매국적 황제의 등장
“프로이센에서 이제 군대를 빼게.”

첫 황제의 취임 일성은 모든 러시아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로이센을 상대로 대승을 앞둔 상황에서 작전 중단(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를 존경한다네” 표트르 3세 초상화.
친가 쪽이 독일 유력 집안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이었던 표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를 선망했습니다. 그저 그런 제후국인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의 영웅담을 되뇌고 살았지요. 프리드리히가 러시아에 의해 무너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이득을 위해 러시아 황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요. 표트르 3세는 황제의 재목이 안됐던 셈이었지요.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결정으로 살아남았고, 다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끌며 현대 독일의 기틀을 다집니다. ‘역사의 서문’을 쓴 역사학자 칼 구스타브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표트르는 멍청이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쿠데타를 계획한 러시아
러시아는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황제라는 사람이 개인적 사감 때문에 러시아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니요. 화가 난 건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군대와 귀족이 한 사람을 옹립합니다. 황후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표트르 대제도 승하한 직후, 황후가 그 자리를 계승했었지요. 체포된 표트르 3세는 감옥에 갇힌 뒤 정확히 8일만에 죽었습니다. 부검 결과는 치질과 뇌졸중.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나라 팔아먹은 표트르 꺼져라.” 쿠데타가 일어난 러시아를 묘사한 모습.
1762년 9월,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황제 자리로 즉위식을 가졌습니다. 1년 사이에 벌써 두 번의 대관식. 러시아는 내심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지요. 위중한 시기에 잇따른 정권교체, 거기에 여자 지도자라는 불안요소까지 더해졌으니 무리도 아니었지요.
혼군인줄 알았더니 명군이었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모두의 불안을 단숨에 날려버렸습니다. 남편이 불륜에 빠진 사이, 그녀는 차근차근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군주 표트르 대제처럼 계몽주의적 역량을 쌓아올리고 있었지요. 물론 밤에는 불륜남이 그녀의 침대를 찾았지만요.

그녀의 치세 아래 러시아는 비약적으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단순히 내치만 잘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여성의 몸으로서 군사강국을 일굽니다. 러시아-튀르키예 전쟁(1770~1774년) 전쟁에서 승리해 흑해 제해권을 빼앗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크림반도를 탈환한 것도 그녀의 공이었지요. 오늘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두고 우크라이나와 대립각을 세운 배경입니다.

군사지도자로서 이미지가 부각된 예카테리나 2세. 덴마크 화가 비길리우스 작품
동유럽의 강대국 폴란드를 분할시킨 것도 예카테리나 치세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재임 기간 늘어난 러시아 영토가 52만k㎡에 달할 정도입니다. 벨라루스·리투아니아·노보로시아·북코카서스·동부 우크라이나도 이제 러시아의 땅이 되었지요.

러시아를 유럽화하려는 작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유럽의 지성을 모신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등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정치 철학을 배웠습니다. 아서 영, 자크 네커와 당대 경제학 석학들 역시 그녀가 설립한 자유경제협회에 가입해 활약했지요. 예카테리나는 유럽의 석학으로부터 배운 식견을 러시아의 정치에 반영하려고도 애썼습니다.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고 중산층을 두텁게 하기 위한 법령 발표도 했었지요. 여성 최초의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도 예카테리나의 공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 스몰니 연구소를 설립해 러시아의 지적 수준을 끌어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마련된 스몰니 연구소. 앞의 동상은 레닌. <저작권자-Andrew Shiva>
영웅호색은 남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나봅니다. 통치 과정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를 갈아치웠습니다. 하지만 허투루 만난 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남자들을 이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후의 남자들은 궁정에서도, 침대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증명해야 했었지요. 실제로 남편 표트르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킬 때도 군사적 행동을 이끈 사람은 예카테리나의 정부 그레고리 오를로프였습니다.
불륜이 국가의 이익으로
예카테리나의 정부 하면 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포템킨’이었습니다. 군인이었던 포템킨은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쳐 예카테리나의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기병대 소장으로서 러시아에 여러 승리를 가져다주었지요. 그리고 그는 호기롭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폐하의 영광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뿐입니다.”

10살 연하의 포템킨은 그렇게 예카테리나의 침실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카테리나를 위해 언제나 싸움터에 나갔던 그의 용맹함을 기억해 20세기 러시아 제국은 전함에 포템킨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전함 포템킨’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지요.

35세 포테킨.
포템킨과 연애하던 45세의 예카테리나
포템킨과의 열정이 식을 때 쯤에는 또 다른 남성과 내연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포템킨은 옛 여친(?)의 새 남자를 구해주는 ‘뚜쟁이’ 역할을 해줬을 정도였지요. 최고 권력인 예카테리나와 척을 져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한 예카테리나의 마지막 남성은 플라톤 주보프였습니다. 예카테리나가 점찍은 마지막 남성이었지요. 둘의 나이 차는 38살. 물론 예카테리나가 연상이었습니다.

성욕에 빠진 여왕...러시아를 만들다
예카테리나가 사망할 당시 그녀가 말과 수간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로 그녀의 성욕은 유명했지요. 진짜 사인은 뇌졸중이었습니다. 1796년, 11월 5일의 일이었지요. 그녀의 치세로 러시아는 조금 더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 봐야 했지요.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는 예카테리나를 묘사한 그림.
미를 향한 집착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미남자를 찾아다닌 실력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수집했던 것이지요. ‘에르미타주 미술관’입니다. 소장품만 300만개에 달할 정도로 세계적인 박물관입니다. 표트르 대제가 만든 겨울궁전의 내실을 예카테리나 대제가 채웠지요. 한 여인의 권력과 성에 대한 욕망이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셈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 전시된 예카테리나 2세 조각상. <저작권자=Antonleto>
<네줄요약>

ㅇ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여왕은 ‘대제’로 불리는(표트르 대제와 함께) 한 인물이다.

ㅇ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현대식 국가 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ㅇ그러면서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수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60세에는 38살 연하와 내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ㅇ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도덕군자보다 욕망하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역사가 증명한다.

<참고문헌>

ㅇ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까치, 2011년.

ㅇ다닐로프, 새로운 러시아 역사, 신아사,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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