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카메라를 향해 ‘김치’를 외치게 되었을까?

2023. 10. 7. 11:08■ 사진/사진 이야기

 

백년사진 No. 38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남녀 한쌍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사진설명을 보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9월 26일 [백년사진 No. 35]에 포스팅했던 “우리는 언제부터 하늘을 날았을까… 첫 비행가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의 주인공 말입니다.

기쁨에 지쳐 말조차 없는 안창남씨의 남매 상봉/ 1923년 10월 5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안창남씨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 누이를 만나는 상봉 장면이군요.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지진과 일본인들의 린치로 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하던 시절, 당시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로 유명했던 안창남씨가 죽었다는 잘못된 뉴스가 퍼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랬던 안창남씨가 배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후 부산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 누이와 상봉을 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입니다.

▶이날과 전날 동아일보 지면에는 안창남씨 귀국 관련 소식이 아주 많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우선 전날 부산에 도착한 기사의 원문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安昌男氏 昨朝釜山發 고생은 햇스나 원긔는 왕셩해

일시사거설을 전하든 비행가안창남(安昌男)씨는 삼일 아츰 부산에 입항하는 창경환(昌慶丸)으로 상륙하야 오전 구시에 부산을 떠나는 특별 급행렬차로 경성에 향하얏는대 씨는 디진중에 여러가지로 고생을 만히 하얏스나 원긔는 매우 왕성하야보이더라(부산뎐화)
/1923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3면

▶사진이 실린 10월 5일에는 안창남씨의 증언이 실려 있습니다. 좀 길지만 누군가에는 필요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원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굳이 읽으시지 않으시고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日本人으로變裝하고
일본 여자의 도음을 바다 군마현으로 피하기까지

◇安昌男氏經驗談◇

구사일생의 위경을 버서나서 꿈속가치 고향에도라온 안창남씨는 깃붐이 넘치는 얼골로 이번 고생한 경력담을 다음과 가치하며 다시 한번 감개가 무량한 듯 하더라

四人이 坐而待死

디진중에 병실에서

나는 몸에 병이 잇서서 디진이 나기전 약삼주일전부터 경교구(京橋區)에 잇는 지뎐병원(池田病院)이라하는 곳에 입원을 하얏슴니다. 디진이 이러나든 일일에는 나와 나의 친구 한사람과 이웃방에 잇는 환자 한사람과 간호부 한사람 도합 네사람이 내방에 모혀서 뎜심밥을 먹으랴하는대 돌연히 집이 흔들니기를 시작 하더니 차차 디진이 커저서 방바닥이 들석~하고 방네귀가 어긋나기를 시작하기로 창밧글 내다본즉 압헤잇는건축청부(建築請負)영업하는 삼칭벽돌집이 와글~하며 뎐차길로 문허집듸다 이광경을 본 우리 네사람은 밧그로 나아가도 살길은 업슬것을 짐작하고 방한가운대에 네사람이 머리를 맛대이고 죽더라도 가치죽기로 하얏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아니하야 디진은 긋치엇슴으로 우리병원에서는 아모 연고도 업시 의사와 환자가 모다 거리로 뛰어나아갓슴니다

船便으로芝浦에

바다에서 하루밤

거리로 나아가본즉 벌서 뎐차길에는 사람으로진을첫고 압뒤집이 모다 문허젓는대『도라가는 디진은 뎡녕 또잇슬것이오 이만큼 큰 디진이 잇섯스니 의례히 불이날것이라』는공론이 분々하야사람들은 모다 엇지할줄을몰나 할때 벌서 여기저기서 불이일어나니순식간에우리가서잇는곳까지왓습니다 이때에 나는 부근 내속에 뷔인배가 잇는 것을 보고 두말할 것 업시 그리로 뛰어들엇갓슴니다 이때에 나와가치 뛰어나온 환자와 간호부 몃명이 나의탄배로 뛰여들엇슴니다 물에서위험을피하랴하얏스나화세는점々맹렬하야 도뎌히 조그만한내속에서는 아니될줄을 알은 우리는 배를 떼워가지고 다라나기를 시작하얏스나 얼마 아니가서 곳 불보다도 무서운 해일(海溢)을 맛낫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내가좁음으로별일은업섯스며그길로바로품천(品川)으로 도망을하야 그날밤은지포(芝浦)해안에서 불안중에 지냇슴니다

虎口에서虎口에

품천에서격근위경

그이튼날|이일정오쯤하야 우리는모다 배가곱흠으로 무엇을 조금먹으랴고 품천에 배를대이고 상륙하얏스나 위험은 갈사록 더 심하야젓슴니다 오후 두어시가 되닛가 소방대의 종소리가사방에서요란하게들니더니남녀로소할것업시 사람이란사람은 모다바다가로밀녀나옴을보고우리는웬일인가또불이낫나하얏스나나종에알고본즉엇더한일이생겻다하야 그와가치 소동을한것입니다우리는할수업시다시배를탓더니청년단인지누구인지알수업는사람들이와서 조사를 너무 심하게함으로나 는 이제는 그만이다!하엿스나 요행히 위경을 면하고 그밤은 역시 바다에서 새인후 그이튼날|삼일에는 다른환자들과 함께 품천에잇는 품해병원(品海病院)에입 원하게 되얏습니다 그러나나는엇지할수업시그자리에서안등창남(安藤昌男)이라고 일본일홈으로 행세를하게 되얏슴니다

商人으로變裝하고

일본녀자의구제로

그병원에도 삼사일잇스닛가 잇지 못할 형편이 잇서서 이제는 어대로 갈지를 모르게되얏슴니다 그러나 죽는데에도 살약이 잇다는셈으로 나의 목슴을 구원해준사람은 어느 졂은 일본 녀자올시다 그는 나와 가튼병원에 입원하얏다가 이곳까지 가치온 죽뎐(竹田)이라는 일본청년의 안해인대 내가 조선사람 인것도알고 사라날 도리가 업는 것을 동정하야

자|안등씨!별수업스니나와 가치 갑시다 저이(자긔남편)는 일본사람이닛가 상관업시 나와 가치 부부처럼 차리고갑시다

하는 소리를들은 나는 고맙다할 것도업시『그럽시다!』하고 일본상인처럼 변장을한후 가방을 가치들고 뎡거장까지 무사히 거러가서 품천에서 차를타고 군마현전교시(群馬縣前橋市)에잇는 죽뎐의 형님집으로 갓습니다 그날인은륙일줄로생각함니다

通信도不自由하야

죽엇다는소문까지

전교시에가서는 거의 삼주간동안이나잇스면서도 그주인에게까지 자긔가조선사람인것을 알니지안코 지냇슴니다 이러한사정이잇기때문에 아모데도 통신할자유가업서서 필경 동경에서는 내가죽엇다는소문을 내게된것이외다생각하면이번일은살엇서도 살은듯십지도안코 죽엇다는소문도 무리는아니외다 그리하야 나는지난이십사일에야 처음으로 동경으로 도라가게되얏는대 급한마음에는 그날로라도귀국하고십헛스나 사정이 허락지아니하야 이제야도라오게 된것이오 그동안에 이만사람을위하야 만히근념해주신 여러분에게는 무엇이라구 감사한말슴을엿줄길이업슴니다


 

▶이 사진을 보고 제가 주목한 점은 “표정이 왜 저럴까? 너무 밋밋한데…”였습니다. 아마 지금의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저 정도 표정의 사진을 찍은 후 신문 지면에 게재한다면 뉴스룸 내부에서는 큰 논쟁이 붙을 것입니다. 죽었다던 가족이 살아 돌아왔는데 기쁨도 슬픔도 전혀 표현되지 않는 사진을 어떻게 지면에 게재하냐고 말입니다.
물론 사진설명에는 “기쁨에 지쳐 말 조차 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써 있지만 말입니다.
뉴스룸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이 사진이 상봉 장면, 그것도 뉴스로 이미 유명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들의 대부분에서 저는 당시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옛날 사진에 나오는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걸까요?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지 않았기도 했거니와 인쇄상태도 좋지 않아서 이기도 할겁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 생각해봅니다. 피사체들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100년 전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평소 얼굴 표정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어색해 하던 시절, 사진기자들이 누군가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웃음이 사진으로 표현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시절 결혼사진이나 가족사진의 표정과 지금의 사진을 한번 비교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 아마 지금의 사람들이 안창남씨와 누이의 상봉 장면을 촬영해야 할 상황이었다면 혹시 ‘카메라를 보면서 웃어봐주세요!’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요? 신문사 사진기자로 25년 동안 일하면서 갖고 있는 의문 중 하나가 바로 “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특히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웃어보라는 주문을 할까?”입니다.
여러분도 아이나 부모님의 사진을 찍을 때 “김치~~”라고 외쳐보셨을 겁니다. 사진기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문에 들어가는 인터뷰 사진이나 제품 소개 사진 등에서는 어김없이 ‘미소’가 들어갑니다.

 

▶영어권에서는 김치 대신에 치즈를 외칩니다. “Cheese~~”는 김치와 마찬가지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치아가 드러나서 웃는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김치”라고 외치는 건 미국의 “Cheese“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름 토착화 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어학자들이 해명할 문제이지만 치즈나 김치 모두 마지막 자음이 치아를 드러내는 음가(音價)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류는 사진을 찍을 때 “Cheese~~”를 외치는지에 대해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치즈는 언제부터 카메라와 함께 하기 시작했을까요?

 

▶뉴욕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 교수인 Christina Kotchemidova가 쓴 논문, ‘Why We Say “Cheese” : Producing the Smile in Snapshot Photography’ 에 따르면,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으며 사진 찍는 문화는 카메라가 발명된 초기에는 없었습니다. 19세기에는 유럽스타일의 정숙하고 근엄한 얼굴 표정이 다수였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그러한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교수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웃으면서 찍는 사진은 20세기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20세기에 넘어오면서 웃는 사진이 대중화되었을까요?
논문은 기술의 발전이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카메라는 지금처럼 순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모델은 카메라 앞에서 30초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사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인데 이 시간동안 미소를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색할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대중매체의 발달입니다. 우월한 외모의 배우와 가수 그리고 정치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지면서 시청자와 독자들은 점점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솔직한 모습보다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자연스레 웃는 모습이 ‘대세’(cultural leadership) 되었다는 것이죠.

별로 동의하진 않지만 세번째 이유로 언급되는 것은 치아교정술의 발달입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치아를 가지런하게 배치하는 수술이 대중화되면서 자신있게 치아를 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웃는 사진이 먼저인지 치아교정술이 먼저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두 가지를 연관시킨 교수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유명인의 무표정한 ‘상봉 사진’을 통해 사진 속 표정이 시대별로 다를 수 있다는 얘기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무표정하게 있는 것이 우리의 얼굴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