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쇼'에 당한 군인의 각성... 퇴임사에 담긴 진심

2023. 10. 4. 14:32■ 국제/미국

대통령 '쇼'에 당한 군인의 각성... 퇴임사에 담긴 진심 (daum.net)

 

대통령 '쇼'에 당한 군인의 각성... 퇴임사에 담긴 진심

[김정호 기자] ▲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이 지난 9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메이어 기지에서 열린 합참의장 이취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9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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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쇼'에 당한 군인의 각성... 퇴임사에 담긴 진심

김정호입력 2023. 10. 4. 13:27

 
마크 밀리 전 미국 합참의장 이임사의 의미... "미군은 독재자 아닌 '헌법' 수호"

[김정호 기자]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이 지난 9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메이어 기지에서 열린 합참의장 이취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지난 9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열린 미군 합참의장 이·취임식은 이임사로 인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퇴임하는 마크 밀리(Mark Milley) 합참의장은 이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가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것은 국가도, 집단도, 종교도, 왕이나 왕비도, 폭군이나 독재자도 아닙니다.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a wannabe dictator)도 아닙니다.  우리가 개인을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것은 미국의 헌법이고 미국이라는 이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합니다."    

 

밀리 합참의장의 이임사에 담긴 헌법 수호 의지

미 합참의장은 미군 서열 1위로 210만 명의 미군을 대표하는 자리다. 따라서 밀리 의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행간을 읽어야 한다. 미국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이 누구를 암시하느냐다.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해당 발언의 주어 '우리'는 미군을 의미한다. 미군은 대통령 개인이 아닌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미군 장교의 임관 선서를  떠올리게 한다. 임관 장교는 "나는 국외 및 국내의 모든 적으로부터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서한다.
밀리 의장은 이임사를 통해 헌법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군의 본분 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밀리 의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8년에 임명했다.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해병대 사령관 출신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국방부 장관이 추천하면 승인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직접 후임자를 골랐다.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에 장군다운 캐릭터라 낙점했고 임명권자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밀리 의장이 어떤 군인인지 알게 될 때까지만이었지만 말이다.

<뉴욕타임스>의 피터 베이커와 <뉴요커>의 수잔 글래서가 2022년에 펴낸 <더 디바이더(The Divider: Trump in the White House)>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자기도 히틀러처럼 완전히 충성하는(totally loyal) 장군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군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짐작하게 한다.  
 
 
  2022년에 출간된 <디바이더>는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백악관과 미 행정부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내막을 잘 파헤쳤다.
ⓒ amazon
  
트럼프 전 대통령이 원한 것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군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해병대원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복무한 아버지와 육군 사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작은 아버지를 둔 군인 집안 출신인 밀리 의장은 강골이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ROTC 출신으로 군에 들어선 그는 자기 주관도 뚜렷했다.

군을 수중에 넣으려는 행정부의 수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군의 중립을 지키려는 군부의 수장 사이의 갈등은 알게 모르게 계속 증폭되었다. 2020년 5월에 있었던 대대적인 반인종차별 시위에 대한 대응을 두고 양자는 서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그해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깔려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항하지도 않고 숨을 못 쉬겠다며 여러 차례 호소했는데도 목을 계속 무릎으로 압박했다는 목격담이 나오면서 여론의 분노가 폭발했다. 흑인에 대한 공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다시 불붙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장 폭동의 양상까지 보였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해당 지역 주지사에게 주 방위군을 동원한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만약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1807년에 제정된 폭동진압법(Insurrection Act of 1807)을 발동해서 주 방위군을 직접 동원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법과 질서'의 대통령이라고 자칭하며 성명을 발표한 후, 인근의 세인트존스 교회로 이동했다. 백악관 바로 옆이라 역대 미국 대통령이 종종 예배에 참석해서 '대통령의 교회'로 불린다. 그런 상징성 때문에 시위대가 방화를 시도했고 건물 일부가 불에 그을렸다. 교회 정문 앞에서 성경책을 든 채 사진만 찍고 간 트럼프를 두고 시위대의 폭력성만 부각하려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며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교계는 교계대로 종교를 정치에 악용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에게 이용당한 군인의 사과
 
 
  2020년 6월 1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의 세인트존스 교회 밖을 방문하기 위해 백악관을 나서는 모습. 왼쪽부터 트럼프 대통령 뒤로 윌리엄 바 법무장관,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 걸어가고 있다.
ⓒ AP/연합뉴스
 
밀리 의장에게도 불똥이 튀었는데 대통령 일행이 교회로 이동 중 라파예트 광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란히 걷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근처에 있다가 대통령의 요청으로 잠시 동행한 것에 불과했지만 군복을 입은 합참의장이 대통령과 함께 걷는 사진이 주는 파장은 매우 컸다. 군이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대통령의 의도에 보기 좋게 말려든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었지만 군을 대표하는 합참의장의 경솔함에 대한 군 안팎의 비판은 거셌다. 밀리 의장은 1주일 뒤에 있었던 국방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나는 그날 그곳에 있지 않았어야 했다"면서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밀리 의장이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즉각 사임하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임기를 다 채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에는 자기가 자리를 지켜야만 군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대통령의 전횡을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양자의 대립이 이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군인입니다. 미국의 기본 원칙은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 밀리 의장의 <디 애틀랜틱> 인터뷰

2020년 11월 3일에 치러진 미국 대선은 트럼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으로서는 조지 W. 부시 이후 28년 만에 재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선전이었고 막판 뒤집기가 가능하다는 트럼프의 몽니 때문에 정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지키고, 감춰야 할 것이 많은 권력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연장을 시도한다면 가뜩이나 두 쪽으로 갈라진 미국 사회가 어떤 파국을 향해 치달을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임기가 남은 대통령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정치 권력으로부터 군을 지키려는 절박한 노력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서 퇴임하는 밀리 의장을 공개 경고한 것을 두고 문제점을 보도한 CNN 뉴스 장면.
ⓒ CNN
 
밀리 의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대선 직전 워싱턴 정가와 펜타곤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불리한 대선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려고 10월 30일을 기해 중국에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곧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갔다. 까딱 잘못하면 두 군사 강국 사이에 예기치 않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밀리 의장은 리쭤청(李作成) 당시 중국군 총참모장에게 전화해서 미군은 전혀 그럴 계획이 없으며,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전에 통보하겠다고 언질을 주었다. 두 번째 통화는 2021년 1월 6일에 미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진압된 직후에 이뤄졌다. 이후 밀리 의장은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중국군 최고 수뇌부와의 두 번에 걸친 통화는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무장한 두 강대국 간의 군사적 행동을 억제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시도"라고 증언했다.

지난 9월 22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SNS인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에 올린 글에서 밀리 의장이 대통령의 의중을 중국 측에 누설한 것은 "예전 같으면 사형에 처했을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미언론은 트럼프의 이런 메시지를 우려하고 있다.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한 암묵적 지시로 보기 때문이다.

극렬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형사 기소한 검사들의 신상을 털고 공공연하게 암살 위협까지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해당 발언은 자신을 배신한 밀리 의장을 '죽여도 좋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밀리 의장은 자신과 가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지금, 만약 그가 백악관으로 복귀한다면 제일 먼저 손 볼 사람 리스트에 밀리 의장의 이름부터 적어넣을 것이라는 예측이 무성하다.
 
 
  지난 9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메이어 기지에서 열린 합참의장 이취임식에서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과 차기 미 합참의장인 찰스 브라운 공군 참모총장이 악수하는 모습.
ⓒ AFP/연합뉴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밀리 의장이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원칙이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이임사를 한 것이다. 한편 퇴임하는 밀리 합참의장의 후임은 찰스 브라운(Charles Q. Brown) 공군 참모총장이다. 20년 전에 흑인 콜린 파월 장군이 합참의장이 된 후로 두 번째 흑인 합참의장이다.

이로써 바이든 대통령은 흑인 국방부 장관에 이어 흑인 합참의장을 임명했다. 이 또한 상징적인 일이다. 브라운 의장은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는 원칙주의자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미군을 세계 최강으로 만드는 힘은 군 수뇌부가 군이 지켜야 할 원칙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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