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하자, 사생활은 노터치” 그래서 연애했더니 생긴 일

2023. 9. 17. 06:48■ 인생/세상만사 천태만상

“졸혼하자, 사생활은 노터치” 그래서 연애했더니 생긴 일 | 중앙일보 (joongang.co.kr)

결혼생활 11년 차, 고민혁(가명)씨와 서지안(가명)씨는 ‘졸혼’하기로 하고 이런 합의서를 씁니다.

✔ 서로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는다.
✔ 각자 시댁이나 친정 일에 관여하지 않고 왕래도 하지 않는다.
✔ 각자 부모 상을 당했을 때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참석하기로 한다.
✔ 월 생활비 200만원을 준다.
✔ 주택 소유권은 공동명의로 한다.
✔ 2~3년 후 이혼할지 졸혼 상태로 머물지 다시 상의하기로 한다.

3년 후, 지안씨는 법원에 갑니다. 그런데 이혼 재판을 하러 간 게 아닙니다. 민혁씨의 여자친구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겁니다. 실제로 지난달 판결이 나온 사례인데요.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의 사건 24. 자유와 이별 사이, 졸혼

지난 4월 MBC「결혼지옥」프로그램 중 일부. 방송 화면 캡쳐

서로 노력했는데 마음에 상처가 남고 힘들 때는 졸혼도 고려해 보시라고 한다. 

-오은영 박사, MBC 「결혼지옥」(지난 4월)

 7년 전 졸혼했다. 계획도, 계기도 없지만 언제부턴가 혼자 살아야겠다 싶었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이혼할) 이유가 없잖아. 

-배우 백일섭, tvN 「회장님네 사람들」(지난 4월) 

유명인의 언급이나 사례를 통해 ‘졸혼’이란 단어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졸혼은 이혼과 정확히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이혼은 법적 용어인 반면 졸혼은 그렇지 않아서 사실 정의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우리가 이런 형태의 결합도 용인하게 되면서 널리 쓰이게 된 말인데요. 이번 〈당신의 법정〉에서는 실제 재판 사례와 조정 내용을 통해 졸혼을 졸업하게 해드릴게요.

📌이 순서로 준비했어요

- 연애도 가능? 졸혼 합의 내용 보니 
- 집에서 써도 될까? 두 가지 졸혼 루트
- 이혼보다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

결혼·졸혼·이혼 비교를 위해 뜬금없지만 빵에 빗대 보겠습니다. 통상의(아니, 결혼식 당시 예상하는) 결혼생활은 생크림빵·단팥빵·슈크림빵 같은 겁니다. 내부가 채워져 있습니다. 뭘 얼마나 넣을지, 그러니까 달콤하게 만들지 짜게 만들지, 풍부하게 만들지 심심하게 만들지 등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며 밖에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졸혼은 공갈빵입니다. 밖에서 보기엔 평범한 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속은 비어 있는, 껍데기만 있는 빵이지요. 이 외피(外皮)마저 깨 버린다면? 이건 이혼입니다. 정리하면, 졸혼은 결혼생활이라는 껍데기는 유지하되 내적으론 결속을 끊거나 느슨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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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했으면, 연애해도 되나요? 


중앙포토

지난달 나온 판결을 보면, ‘합의 내용에 따라, 가능할 수 있다’ 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지안씨 부부 얘긴데요. 민혁씨는 지안씨와 졸혼합의서를 쓰고 3개월 뒤 지인 소개로 임예영(가명)씨를 만나 1년 넘게 사귀었고 지안씨는 예영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결과는? 지안씨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서울북부지법 김성래 판사는 “예영씨와 민혁씨의 교제 행위는 지안씨에 대한 불법행위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졸혼합의서 문구(서로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는다)와 ▶부부 대화 내용( “다른 남자를 만나든 말든 상관 않겠다”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상관 없으나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돼 줄 여자를 만나라”), ▶지안씨가 예영씨의 존재를 알게 된 뒤 관계 정리 요구 등 조치를 1년 넘게 취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지안씨와 민혁씨 부부는 상호 성적 성실 의무를 면제해 줬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봤어요.

다만 이 판결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졸혼한 사람과 연애하다 상대 배우자로부터 소송을 당할 때 위자료를 물어줘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졸혼합의서 ‘사생활 노터치’ 조항이 곧바로 “제3자와 이성 교제까지 포함하는 사생활의 자유를 전면 용인하고, 부정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성적 성실 의무를 면제해주는 건 아니며(수원지법 성남지원, 지난해 7월)” “졸혼은 두 사람의 법률 관계에 영향을 미칠 뿐 제3자(소위 상간남·상간녀)와의 법률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서울중앙지법, 지난해 12월)”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오히려 ‘졸혼’이란 단어를 언급해 불리해진 사례도 있었습니다. 법률상 혼인 중임을 알았다는 증거니까요. “피고는 A씨와 텔레그램으로 100살 전에는 같이 살자는 얘기를 하던 중 ‘졸혼도 방법이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졸혼은 혼인 관계를 전제로 쓰는 단어인 점 (…) 피고는 A씨가 법률상 혼인 중임을 알면서도 그와 불륜 관계를 유지해 A씨와 B씨의 부부 공동생활을 침해했다.(대구지법 경주지원, 지난 2021년 12월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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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 법원 가서 해야 하나요?


중앙포토

법원을 통해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법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닙니다. 졸혼에 이르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①재판상 이혼을 하러 갔는데, 조정 과정에서 이혼 대신 졸혼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는 경우 ②처음부터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졸혼합의서를 쓰는 경우 입니다. ①이 ‘어쩌다 졸혼’이라면, ②는 ‘계획적 졸혼’인 셈이죠.

어떤 방식이든 두 사람이 합의한 내용을 자유롭게 담는다는 건 동일합니다. 다만 부부 간의 본질적 의무를 모두 면제하는 건 안 됩니다. 이혼과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요. 민법상 부부의 의무에는 동거·협조·부양의 의무 등이 있습니다.

민법상 부부 간의 의무

826조 1항: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정당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동거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서로 인용하여야 한다.

별거는 졸혼에 흔히 따라붙는 조건이지만 대략적으로라도 그 기간을 정해야 하고, ‘영원히 별거한다’는 식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협조와 부양의 의무는 자녀 양육이나 생활비 지급 등으로 대표되는데 졸혼 후 누가 얼마나 어떻게 할지를 합의하는 식이고요. 고(故) 이외수 작가와 졸혼했던 전영자씨는 이 작가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병간호에 나섰고,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했습니다. 졸혼과 관계없이 부양의 의무를 지킨 것이지요.

'과거 언급 금지' '술 취해 폭언 금지' 실제 졸혼 합의 내용 보니

정해진 내용과 양식은 없습니다. 조정 조서도 제각각입니다. 거주 형태와 경제적 문제 외에도 앞으로의 관계에서 희망하는 내용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를 조건으로 삼아 어길 시 이혼한다는 조항을 마지막에 붙일 수도 있고요. 실제 조정 사례를 통해 어느 정도로 구체적으로 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드릴게요.

◦ 피고는 원고의 거주지나 직장에 일절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 조정 성립 이전에 발생한 일에 대하여 서로에게 잘잘못을 추궁하는 등의 언행을 일절 하지 아니한다.
◦ 경조사, 자녀 결혼, 손주 돌잔치 등에서 만날 경우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대화할 때 상호 고운 말을 사용하고 존칭을 사용한다.
(2021년 8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졸혼한 부부의 조정 조서 내용 중 일부)

◦ 원고와 피고는 졸혼하되 원만한 가정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 피고가 원고에게 원고의 주거지 마련을 위하여 XXXX년 X월경 XXXX원을 이미 지급하였음을 확인한다.

(2022년 8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졸혼한 부부의 조정 조서 내용 중 일부) 

◦ 명절, 어른들 생신, 제사 등 가족행사에 상대방을 동반하지 않으며 부부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 피고는 원고에게 원고가 자녀들과 거주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도록 XXXX년 X월 X일까지 XXXX원을 지급한다.
◦ 서로 상대방과 협의 없이 거액의 부채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은 부부재산 상황의 변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다.
◦ 피고는 주취 상태에서 원고와 자녀들에게 폭언·폭행 등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2019년 10월, 청주지방법원에서 졸혼한 부부의 조정 조서 내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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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 이혼보다 나은 건가요? 


셔터스톡

졸혼이란 결혼이란 껍데기만 남긴 채 내부를 비우는 ‘공갈빵’ 같은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껍데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마저도 깨 버리는 이혼보다 졸혼이 나을 것이고, 그 껍데기마저 벗어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얻고 싶은 사람에겐 이혼이 나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혼인 상태 유지라는 껍데기는 ①배우자로서 나중에 상속을 받을 수 있음 ②K사회에서 ‘정상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음 ③언제라도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는 희망 등을 의미합니다. 졸혼은 절대적인 건수가 많지 않지만 주로 노년층에서 황혼 이혼 대신 많이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①때문입니다. 가부장적 결혼제 내에서 오랜 기간 고통 받아온 할머니들이 ‘이제라도 자유롭고 싶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혼을 해 버리면 나중에 상속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혼이 부정적인 꼬리표라고 인식하는 경우라면 ②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린 자녀를 위해 ‘조금 더 클 때까지만 버텨보자’며 졸혼을 선택하는 부부도 있습니다.

반면, 졸혼으로 ‘결혼 일시 정지, 이혼 유예’를 하는 게 ‘당장 이혼’보다 안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일단 상속을 제외한 경제적 부분에서는 졸혼이 좋을 게 없습니다. 3년간 졸혼하고 나중에 이혼하는 경우 따로 살았던 3년간 각자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선 부부 공동재산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어요. 또 졸혼으로 따로 살게 되면 상대방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물론이고 재산을 처분하는지, 은닉하는지, 명의를 바꾸는지 등을 알거나 저지하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졸혼 합의를 하면서 재산 분할 합의도 해 놓을 수 있지만, 원만한 합의가 되지 않아 재판으로 이혼하게 되는 경우 모든 것은 ‘참고사항’이 될 뿐입니다.

📌당신의 변호사

정현주 변호사(법률사무소 봄)

졸혼이란 사실 법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신분적 변화 없이 당사자끼리 ‘사실상 이혼을 한 것처럼 앞으로는 각자 생활하자’는 의미기 때문에 당장 양육권·재산분할·위자료 문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졸혼을 고려하고 있다면 재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해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이혼을 원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재산 분할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졸혼계약을 하며 향후 몇 년 뒤 이혼을 할 것을 전제로 재산 분할 합의서도 함께 작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당사자끼리 합의해 이를 공증하는 절차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공증 여부는 당사자 간의 선택사항이지만 나중에 당사자 중 한 명이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 내용 중 빠지는 부분이 생기면 소송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에 졸혼계약서를 변호사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