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대모’ 박병선 없었다면 프랑스는 금속활자 최고본 알아봤을까

2023. 7. 25. 15:21■ 大韓民國/문화재 사랑

 

‘직지 대모’ 박병선 없었다면 프랑스는 금속활자 최고본 알아봤을까 (daum.net)

 

‘직지 대모’ 박병선 없었다면 프랑스는 금속활자 최고본 알아봤을까

지난 16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는 한국 문화사에 길이 남을 전시가 끝났다. 지난 4월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실물로 널리 알려진 14세기 후반 고려시대 불자들의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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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대모’ 박병선 없었다면 프랑스는 금속활자 최고본 알아봤을까

노형석입력 2023. 7. 25. 14:05수정 2023. 7. 25. 14:30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2011년 별세한 재불 사학자 박병선 박사의 국내 빈소가 마련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16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는 한국 문화사에 길이 남을 전시가 끝났다.

지난 4월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실물로 널리 알려진 14세기 후반 고려시대 불자들의 책이 살포시 펼쳐진 모습으로 세계적인 인쇄문화 기획전의 서두를 수놓았다. 이 고서의 이름을 한국인들은 대부분 안다.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이란 약칭으로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구텐베르크 인쇄를 말하다’란 제목의 파리 기획전은 기실 유럽의 인쇄문화에 혁명을 일으킨 15세기 활판업자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북원 황제의 연호인 선광 7년인 1377년 부처와 역대 고승들의 어록을 간추려 간행된 <직지>를 전시 맨 앞머리에 놓음으로써 세계 인쇄문화사에서 가장 선구적인 유물이자 금속활자 실물 최고본의 자리에 있음을 확정적으로 전세계 학계에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지대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1972년 파리에서 유네스코가 개최한 책의 해 기획전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묻혀있던 <직지>가 출품됨으로써 세계 최고본 금속활자로 공인됐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 작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시도록에 사진조차 실리지 못하고 14세기 수도승 백운에 의해 수집된 승려교육교본으로 1377년 흥덕사에서 인쇄됐다는 단 두줄 정도의 설명만 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1972년 전시 이상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직지심경>의 문화사적 가치를 한국과 전세계에 처음 주도적으로 알린 이는 ‘직지대모’로 일컬어지는 고 박병선(1929~2011) 박사다. 1967년부터 1980년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임시직으로 일하며 한국 등 동양 고문서 자료수집을 도왔던 스승 이병도로부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침입해 약탈해간 왕실문서 의궤를 찾아내라는 당부를 학자 인생의 지상목표로 삼았던 그가 1960년대 말 서고를 뒤지다 뜻밖에 발견한 것이 바로 직지심경이었고 그것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임을 주장해 72년 전시를 성사시키게 된 계기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직지심체요절>.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데 그의 사후부터 이런 박 박사의 업적이 과장, 왜곡됐다는 국내 일부 학자들의 지적이 나왔고 지난해엔 이런 내용이 일부 지방 언론에 처음 소개되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 책을 구한말 조선에서 수집한 프랑스 외교관과 이를 분석한 학자들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란 정보를 알고 기록했으며, 나중에 책을 입수한 국립도서관도 이런 사실을 알고 1972년 전시에 출품했다는 것이 근거다.

19세기 말 재조선 프랑스공사로 재직 중 이 작품을 수집한 콜랭 드 플랑시가 이미 간행연도를 포함한 관련 정보를 책의 표지에 적었고 그의 수집 서적들을 토대로 <조선서지>를 펴낸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도 자신의 저술에서 언급했을뿐 아니라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전시 때도 금속활자로 찍은 최고의 인쇄본이란 사실이 이미 언급됐다는 것이다.

 

도서관 쪽도 이 책을 1950년 원 소장자 베베르의 기증으로 입수한 뒤 한국본 장서 도서번호 109번을 정식으로 붙여 보관하면서 서지정보를 갖고 있었기에 <직지>에 대한 기본 정보는 몰랐던 게 아니라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고 일부 연구자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지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72년 <직지>의 발견 사실이 한국에 보도된 뒤로 구한말 프랑스인의 수집 경위와 쿠랑의 <조선서지>, 도서관에 책이 기증돼 입고된 상황은 이미 언론에 후속 보도되었다. 문제는 1950년 기증 뒤 이 장서를 도서관이 계속 주목하고 연구했느냐다. 1972년 전시 전에는 한국 학계가 <직지>의 존재는 물론 프랑스인들이 관련 서지정보를 남긴 사실도 알지 못했다.

도서관 전문가들이 잘 관리하고 연구해서 출품했다면 1960년대 말 얼굴이 먼지로 새카매지도록 찾아서 직지를 발견했다고 증언한 박 박사의 말은 거짓이나 식언이 된다. 당시 직지를 출품한 공식책임자는 동양문헌실 책임자인 마리 로즈 셰귀로 도록에 공식 명기되어 있지만, 그가 구체적인 출품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직지심체요절>. 문화재청 제공

당시 선광 7년 연호 같은 <직지>의 문자 텍스트 자체나 한국 문헌 등에 대한 정보에 정통한 도서관 내부의 현지인 전문가가 정말 존재했을까? 정작 그들이 20세기 초 프랑스 수집가들이 남긴 서지정보를 주목했다면, 책이 기증으로 들어온 1950년부터 전시된 1972년까지 왜 반세기 넘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인쇄사를 다시 쓸 정보가 있었다면 논문을 쓰고 공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도서관 쪽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0년 이상 묻혀있다가 박 박사가 임시직으로 도서관에 입사하고 수년이 지난 뒤인 1972년 전시에 돌연 책을 출품한 것이 프랑스 당국의 혜안에 의해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 박사는 박물관 도서관에서 일개 평직원, 그것도 일개 촉탁 임시직원에 불과했기에 획기적인 사료를 발굴했어도 도록에 기명이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활자사를 연구해온 중견 학자인 정재영 한국과학기술대 교수는 “20세기 초 직지의 서지 정보를 파악해 분류했다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쪽이 책이 들어온 1950년부터 1972년까지 20년 넘게 서고에 왜 아무런 후속 연구 없이 놓아두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박 선생의 발굴 성과를 폄하하는 건 약소국의 작은 고서에 대한 도서관 쪽의 무지와 무관심을 덮으려는 의도로까지 비친다”며 “한국 고문서에 박식한 전문가가 당시 도서관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수십만권의 고서들 가운데 박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것만 탁 집어서 출품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논박했다.

외규장각 의궤를 찾겠다는 집념과 역사학도로서의 안목, 식견으로 똘똘 뭉친 한국 출신 연구자의 노력이 없었다면, <직지>는 지금도 서고 어딘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꼬레앙 109’란 1952년 기증 당시 일련번호만 덩그러니 붙인 채로 말이다. 50여년 전 이국땅 도서관 장서고 구석에서 우군도 없이 고립된 채 고독하게 고서 더미를 뒤졌을 박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자료사진

<직지심체요절>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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