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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은 한국이고 피는 스웨덴이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내 심장은 한국이고 피는 스웨덴이다"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2] (daum.net)
"내 심장은 한국이고 피는 스웨덴이다"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2]
김지영입력 2023. 7. 11. 13:39
지난 4월 11일(화) 한국을 방문 중인 스웨덴 해외입양인을 대한사회복지회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한국과 스웨덴을 이어 온 본인의 삶이 해외입양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였다. 입양을 인터뷰하다 시즌2 연재는 시즌1과 달리 국내입양과 해외입양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낼 예정이다. <편집자말>
[김지영 기자]
▲ 스웨덴입양인 마가렛요세프손 |
ⓒ 김지영 |
마가렛 요세프손(Margret Josefsson). 1969년 7월 한국에서 태어난 스웨덴 입양인이다. 훗날 그녀를 낳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박혜란'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미들네임에 혜란을 집어 넣었다. 지금 그녀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마가렛 혜란 요세프손'이다.
그녀가 스웨덴에 도착한 날은 1970년 2월, 생후 6개월이었다. 한국에서 그녀를 경찰서에 놓고 간 이는 친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출생신고가 안 된 그녀를 다른 사람이 유기한 아이로 거짓 신고를 했다.
당시 절차에 따라 경찰은 유기로 신고된 그녀를 서울시립아동병원으로 넘겼다. 병원에서는 검진결과가 담긴 의료기록과 함께 입양기관으로 아이를 보냈다. 길거리에서 기아 미아 유기아동이 흔하게 목격되던 시절이었다.
혜란을 낳은 엄마와 아빠는 고등학교를 갓졸업한 어린 나이였다. 혜란이 태어난 직후 아빠는 군에 입대했다. 혜란은 한 달을 엄마 품에 있다 친할머니에게 옮겨졌다. 미혼출산도 용서할 수 없는데 가난하고 장래도 불투명한 아빠와 혜란을 부유했던 엄마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군에 간 아들 대신 혜란을 안은 할머니에게는 죽은 남편 대신 홀로 부양해야 할 자식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덜컥 손녀를 안기고 군에 간 아들의 창창한 미래도 걱정이었다. 할머니는 혜란을 안고 경찰서로 갔다.
입양에 대해 거리낌없이 다 말해준 양부모
마가렛이 자란 곳은 스톡홀롬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레크플라츠라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양부는 엔지니어 양모는 전업주부였다. 두 분 다 온화하고 이해심 깊은 분이었다. 낳은 자녀는 없었고 그녀가 오고 2년 뒤 한국에서 남동생을 한 명 더 입양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동생이 오면 곧 누나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동생은 집에 오자 울기만했다. 다시 한국에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 어린마음을 남겨준 동생이었다. 동생과는 나중에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아이도 비슷한 시기에 낳았다. 자라면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동생과는 사이좋은 남매로 잘 지내고 있다.
▲ 입양당시 마가렛 |
ⓒ 마가렛요세프손 |
마가렛은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마가렛이 입양되는 순간부터 자라는 모든 과정을 마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지켜봤다. 피부색이 다르지만 그들에게 마가렛은 그저 이웃집 아이였다. 마가렛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인종차별을 겪지 않았다.
스웨덴에 만 여명의 한국입양인이 있다. 마가렛 동생이 학교를 다닐 무렵 같은 학년에 3명 정도 입양된 한국아이가 있었고 그 뒤로 조금씩 더 늘어났다.
마가렛은 학교에서는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10대가 되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정체성 고민이 있었다. 태어난 한국에서의 출생정보가 전혀 없어 혈연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을거라는 절망감에 더해 자신이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는 좌절감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스웨덴에서의 자신이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자신이 풀 수 없는 어떤 질문들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느낌도 있었다. 한국인으로서의 혈통과 스웨덴인으로 성장한 배경 사이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마가렛은 한국을 깊게 알고 싶었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군에서 알게 된 생부는 제대하자마자 혜란을 찾았다. 혜란을 키울줄만 알았던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듣고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이어서 입양기관까지 찾아가 혜란이 스웨덴으로 입양간 사실을 확인했다.
1970년대 초반은 해외로 나가려면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은 일부 특권층에게나 해당되는 사치였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밥 먹고 사는 일도 버거운 시절이었다.
스웨덴이라는 낮선 나라 이름도 생소한데 어머니의 거짓신고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혜란의 입양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생부는 크게 낙담했다. 당장 찾으러 갈 수 없었지만 생부에게 혜란은 평생 가슴에 새긴 딸이었다.
혜란이 스웨덴에서 마가렛으로 자라는 동안 군에서 제대한 생부는 생모와 재회 후 결혼해서 아들 둘을 더 낳고 살다 다시 헤어졌다.
▲ 마가렛 입양 2년 후 한국에서 혼 남동생과 어린시절 |
ⓒ 마가렛요세프손 |
1991년,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한국을 방문한 마가렛이 짐을 푼 곳은 서울의 어느 보육원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6개월간 자원봉사를 하며 지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이 시설로 오고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시설과 집단생활 속에 자라는 아이들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입양되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좋은 삶을 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들은 시설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지만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유일무이하게 특별히 대해줄 사람은 거기 없었다. 더군다나 1990년대 초 한국은 어디에서나 물리적 폭행이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혼자 시설 밖으로 나가야 하고 부모도 가족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다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까웠다. 6개월의 시설봉사를 마치고 마가렛은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1993년 어느날 생부로부터 편지가 왔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녀는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야 한다는 너무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런 단순하고 평범한 삶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대학에서 사회사업과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스물 네 살이던 1993년 어느날 한국으로부터 마가렛 앞으로 편지가 날아들었다. 편지를 보낸 이가 생부라고 했다. 유기 되어 입양된 줄로만 알았던 마가렛에게 큰 충격이었다. 생부는 늙어 기억이 사라지기 전 할머니를 붙잡고 가슴에 새겼던 혜란을 다시 찾아 나섰다. 이십여 년 기억을 되짚어 경찰서에서 병원을 거쳐 입양기관을 통해 편지를 보낸 것이다.
한국에서 생부를 만나기까지 많은 편지가 오고 갔다. 생부는 편지에 혜란을 낳기 전후의 상황을 자세하게 말해줬다. 생부는 그 시기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고백했고 그 마음이 너무 안 되고 슬퍼서 마가렛은 울었다. 생부와의 편지는 그치지 않았고 둘은 서로의 삶을 이야기 해주었다. 없는 줄만 알았던 출생정보를 알고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은 사라졌다.
1995년, 한국에서 마가렛과 생부가 첫 상봉을 했다. 편지로 이미 익숙해진 마가렛은 편안한 마음으로 반갑게 생부를 마주했다. 생부는 표정에서부터 숨길수 없는 죄책감으로 오래전 잃었던 딸을 안았다. 생부의 그런 죄책감이 절실하게 다가와 마음이 무거웠지만 생부를 만난 것 자체가 주는 기쁨으로 마가렛의 마음은 충만했다.
생부는 생모와의 반복된 만남과 헤어짐 속에 숨은 사연을 말하기 꺼려했다. 궁금했지만 생모에 대한 지난 삶과 사연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생모를 만났지만 죄책감 때문인지 계속된 만남을 불편해 하다 몇 년 전부터는 만나는 것마저 피하고 있다. 마가렛은 아직 생모의 지난 수십 년의 삶과 고민을 알지 못한다.
생부를 만나고 두 남동생도 만난 마가렛에게 이제 한국은 또 다른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자신을 유기한 할머니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당시의 할머니를 원망하는 것보다 할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웨덴에서의 마가렛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어갔다. 마가렛은 지금 건강센터에서 카운셀러로 일한다.
▲ 양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
ⓒ 마가렛요세프손 |
2004년 결혼한 그녀에게 18세, 15세 된 아들 둘이 있다. 한국과 스웨덴 혼혈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그녀보다 더 많은 인종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그게 좀 걱정이 되어 언제든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절반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건 사실은 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 사람들을 대할 때 곤혹스러운 경우가 있다. 마가렛이 한국말을 못하는 해외입양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한국 사람들은 바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안쓰러운 표정도 감추지 못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외국으로 입양되어 학대 받고 자란 불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 이런 부정적인 편견들이 고착이 되었는지 안타깝다. 게다가 해외입양이 한국에서는 정치적 진영논리로 고정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입양 이슈가 가끔 올라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자기 공부하고 일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기르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바쁘다.
마가렛은 자신이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지금 행복한 삶이 과거에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행복은 그 사람이 겪어온 일로 결정되는게 아니라 그가 겪어 온 일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자신은 성장하는 동안에는 양부모님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지금 남편과는 굳건한 신뢰와 지지 속에 본인의 직업과 삶을 계속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행복한 거라고 말했다.
당신에게 한국과 스웨덴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마가렛이 말했다.
"내 심장은 한국이고 피는 스웨덴이다. 내 폐는 한국이고 공기는 스웨덴이다." 그녀에게 한국과 스웨덴은 어느 쪽이든 자기 삶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모국이고 본국이었다. 그녀의 몸과 그녀의 생각은 한국과 스웨덴에서 긍정되어 완성되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조금은 곤란한 질문일 수 있었다.
"그럼 당신에게 한국의 부모는 어떤 부모이고 스웨덴의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의 눈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마음을 추스린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 했다.
"한국의 부모님은 저에게 생명을 주셨고 삶을 주셨습니다. 스웨덴의 부모님은 내가 그걸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만약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 정글에 떨어졌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의 부모님이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부모님에게로 가서 지금의 제 삶이 된 것입니다."
▲ 남편 두 아들과 함께 |
ⓒ 마가렛요세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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