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만에 드러난 '실미도' 진실…최후의 4명 암매장지 파낸다

2022. 8. 28. 08:57■ 大韓民國/국방 병역

 

48년만에 드러난 '실미도' 진실…최후의 4명 암매장지 파낸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48년만에 드러난 '실미도' 진실…최후의 4명 암매장지 파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50년 전 사형이 집행된 뒤 암매장된 ‘실미도 부대’ 마지막 공작원 4명의 유해를 발굴하라고 이르면 오는 9월 국방부에 권고할 예정이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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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만에 드러난 '실미도' 진실…최후의 4명 암매장지 파낸다

중앙일보

입력 2022.08.28 05:00

업데이트 2022.08.2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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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3일 벽제 봉안소에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제삿상이 마련됐다. 상 위에는 공작원들이 실미도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 놓여 있었다. 우상조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50년 전 사형이 집행된 뒤 암매장된 ‘실미도 부대’ 마지막 공작원 4명의 유해를 발굴하라고 이르면 오는 9월 국방부에 권고할 예정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진화위는 오는 9~10월 중 국방부에 고(故) 임모씨 등 실미도 부대 공작원 4명의 유해를 발굴해 유족에게 반환하라고 권고할 방침이다.

 

암매장 후보지 오류동·벽제·대방동…반세기 만 유해 찾나

진화위가 암매장지로 의심하는 지역은 총 4곳이다. 가장 유력한 건 사형이 집행된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구 공군 2325부대 일대라고 한다. 이밖에 ▶임씨 등 4명 외에 실미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살되거나 자폭한 공작원 20명의 유해 발굴지인 경기 고양시 벽제시립묘지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구 공군본부 일대 ▶한 제보자가 암매장지로 주장하는 인천 부평가족공원 등이다.

이 가운데 서울 대방동 구 공군본부 일대의 경우 김중권 전 공군 검찰부장(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이 2020년 8월 2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처음 폭로한 곳이다. 그는 “매장하려면 관할 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허가도 받고 비밀 유지도 시키기 위해 대방동사무소를 2번 정도 왔다 갔다 한 기억이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게 클로즈업되면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굉장히 은밀하게 진행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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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검찰부장은 당시 이들의 사형 집행을 지휘했던 책임자였다.(▶2020년 10월 24일 중앙일보 「[실미도 50년]"사형시킨 4명 대방동에 묻었다" 48년만의 고백」 참고)

국방부는 이미 필요한 행정절차를 검토하는 등 발굴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화위의 권고 발표가 나는 대로 정확한 암매장 의심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을 시작할 전망이다.

진화위 관계자는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사건이기 때문에 명확한 말씀을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을 아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24명이 섬을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20명은 사살당하거나 자폭했고, 나머지 생존자 4명은 사형당한 뒤 암매장됐다. 사진은 공작원 일부가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한 직후 군과 경찰이 수습하고 있는 현장. 중앙포토

 

앞서 1968년 4월 북파공작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원이던 임씨 등 4명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 부대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한 공작원 24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동료 부대원 20명은 당시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사살당하거나 자폭해 숨졌다.

생존 공작원 4명은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돼 초병 1명 살해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한 뒤 모처에 암매장됐다. 이들이 초병 1명을 살해한 게 맞는지, 맞다면 그 배경은 무엇인지 등을 떠나 국가가 비밀 부대원이란 이유로 사형을 집행한 후 시신을 유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존재 자체를 은폐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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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당시 정부는 공작원 4명을 구속 수사한 사실, 사형 집행 사실조차 은폐하려 했다가 2000년 전후 관련 소설과 영화 등이 나오고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실미도 부대를 둘러싼 실체의 개요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중권 전 검찰부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임씨 등 4명이 군사법원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정부의 조직적인 회유와 협박에 의해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고 집행으로 이어진 것이란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임씨 등 4명을 상대로 “상고하지 않으면 사형당하는 대신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방식으로 살려주겠다”라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재판이 군사법원에서 일반법원인 대법원으로 넘어가면 사건이 민간에 공개되고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탈출 직전까지 받은 인권유린 등 국가 폭력의 실체도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유족 “오빠는 국가폭력의 피해자…탈출 과정서 정당방위”

임씨의 여동생은 중앙일보에 “오빠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이고 탈출 과정에서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며 “유해 발굴 권고뿐만 아니라 재수사나 재심 권고까지 나오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와 중앙일보가 추가로 입수한 국방부의 비공개 조사 자료 등을 토대로 재구성된 실미도 부대 사건의 전말이다.

실미도 부대 공작원 4명은 왜 암매장됐나
1968년 1월 21일 북한 ‘김신조 부대’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청와대 앞에서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노한 박 대통령은 “김신조 부대와 비슷한 부대를 만들어 보복하라”고 지시했다.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지휘 아래 공군은 1968년 4월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공작원 수는 김신조 부대와 같이 31명이었다. 육·해·공 3군 중 공군이 나선 건 비행기로 침투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당초 공군은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형수나 무기수 사이에서 공작원을 모집하려 했다.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죄수를 관리하는 법무부가 제동을 걸었고, 결국 공군은 죄수가 아닌 평범한 20~30대 청년 31명을 ‘훈련 6개월 후 북한 침투작전’ 조건으로 선발했다. 지키지도 못할 특급 보상을 약속하면서다.

공작원의 신분은 애매모호했다. 공작원들에게 군번을 주며 “장교 후보생”이라고 공지했지만, 실제 군번은 가짜였고 서류상에는 민간인으로 분류했다. 부대의 지휘 라인도 불분명했다. 공군 소속이었지만, 중앙정보부의 지휘를 받았다.

훈련 과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공작원들이 구타를 당하는 건 일상이었다. 달리기 훈련 중 “속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위협 사격을 받다 관통상을 당하거나 안전장비 없이 외줄 타기를 하다 추락해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급식이 열악해져 일부 공작원은 부대 내 개밥이나 돼지 먹이를 훔쳐먹었다. 월급은 초기 3개월만 조금씩 나오고 끊겼다. 또한 휴가는커녕 외출과 서신 왕래 등이 금지돼 사실상 감금 상태로 생활했다. 훈련 기간은 약속했던 6개월을 훌쩍 넘었다.

훈련 시작 1년 반가량 만인 1969년 10월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선발대가 백령도로 올라가 전초기지를 세우고 대기할 무렵 상부에서 “회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남북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 분위기를 탄 탓이다.

이후 북한 침투작전은 보류됐고, 실미도 부대의 지옥훈련은 기약 없이 계속됐다. “부대를 해체하고 공작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정부는 “기다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심각한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1968년 7월부터 1970년 11월까지 공작원 7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탈출 등을 시도하다 법적 절차 없이 처형당했다. 몽둥이로 맞아 죽거나 대검에 찔려 살해됐다. 남은 공작원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커졌다.

부대 내에선 공작원들을 달래기 위해 땜질식 대책을 내놓았다. 성욕을 해소해주겠다며 성매매를 시켜주고 전염병을 치료하겠다며 해골 물을 마시게 했다.

1971년 8월 23일. 참다못한 공작원 24명은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인천 시내에 상륙한 뒤엔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높은 분’들에게 호소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군과 경찰은 이들에게 총을 쏘며 저지했고,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공작원들의 버스는 서울 대방동에서 멈춰 서야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공작원들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자폭했다.

대낮 서울 한복판에서 대형 참사가 벌어졌지만, 정부는 진상을 왜곡하기 바빴다. ‘무장공비 침투’ ‘군 특수범 난동’ 등으로 거짓말을 하며 실미도 부대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려 했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사이 실미도 안에서 부대 관련 서류를 소각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버스 자폭에서 생존한 공작원 4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며 회유와 협박이 가해졌다.

공군 수사당국은 축소 수사로 일관했다. 실미도 안에서의 인권 유린 사건들은 물론 공작원들을 제외한 기간병·민간인·경찰 등 43명이 사상한 경위조차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에서 실미도 부대로 내려간 예산이 대거 횡령된 정황도 포착됐지만, 이 역시 유야무야됐다. 아울러 수사당국은 공작원 4명을 구속해놓곤 가족에게 알리지도, 변호인 선임권을 고지하지도 않았다.

생존 공작원들은 실미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초병으로 근무하던 기간병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공작원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모처에 암매장됐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https://www.joongang.co.kr/issue/11272)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